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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감독'은 누구?

by 카이져 김홍석 2011. 2. 21.

프로야구 감독, 남자라면 한번쯤 누구나 꿈꿔보는 자리다.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명예와 영광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다. 대한민국에 내노라는 야구인들 중에서도 선택 받은 소수의 엘리트만이 그 명함을 얻을 수 있지만, 모두가 영예를 거머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인정받는 명장으로 기억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때로는 원치 않게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역사에 남는 경우도 있다.

 

최초의 사나이윤동균(OB, 1991~1994)

 

윤동균 전 OB(현 두산) 감독은 프로야구사에 각종 ‘1기록과 관련이 깊다. OB의 창단멤버로서 프로야구 원년 첫 우승을 이끌었고, 한국시리즈 사상 첫 안타를 기록한 주인공이다. OB 한 팀에서만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며 프로야구 최초의 은퇴식과 은퇴경기까지 치렀다. 감독으로서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선수 출신 사령탑이자, 최초의 프랜차이즈스타 출신 감독이라는 화려한 타이틀까지 더했다. 하지만 그는 사령탑에서 물러나는 순간에는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선수단 파업으로 쫓겨난 감독 1라는 세우지 않아도 될 불명예 기록까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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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1991년 시즌 중 감독대행을 거쳐 정식감독으로 승격된 윤동균은 한동안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을 1993년 가을잔치에 진출시키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TV 어린이 드라마에도 고정출연하는 등 파격적인 쇼맨십도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임기 마지막 해이던 94 9, 부진한 팀 성적으로 포스트시즌 전망이 어두워지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체벌로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으려 했던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당시 최고참으로 윤동균 감독과 불과 7년 차이밖에 나지 않던 박철순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빠따를 맞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9 4일 박철순을 비롯한 고참들의 주도하에 1군 선수 17명이 집단으로 경기출전을 거부하고 숙소를 이탈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해 OB의 성적은 7위로 추락했고, 감독 사퇴를 조건으로 내건 선수단과 여론의 압박에 몰린 윤동균 감독은 결국 폭력 감독이라는 오명을 쓰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구축해놓은 팀 재건의 기틀은 이듬해 김인식 감독이 물려받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내며 재평가 받게 된다.

 

▲ 승수자판기허구연(청보, 1986), “이론과 현실은 달라요!”

 

지금은 야구해설의 대명사로 더 친숙한 허구연은 1985년 당시 34세의 최연소 감독으로 청보 핀토스의 지휘봉을 잡은 바 있다. 감독 출신이 해설을 맡는 경우는 있어도, 해설자 출신의 감독, 그것도 지도자 경험 자체가 일천한 30대의 젊은 감독은 파격적이다 못해 상식을 벗어난 기형적인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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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치밀한 기획이나 검증보다는, 야구를 전혀 모르던 구단주의 취향에 따라 즉흥적인 이벤트성으로 단행된 깜짝 인사였다. 청보의 전력 자체도 워낙 허약했지만, 선수단 내에 이렇다 할 입지가 전혀 없었고 나이 많은 코치들은 고사하고 고참선수들과도 세대차이가 거의 없는 경험 제로의 초짜 감독에게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1986시즌 개막과 동시에 7연패에 빠지며 불안하게 출발한 청보는 첫 31게임에서 8 23패에 그치며 전기리그 꼴찌로 추락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허구연 감독은 강제로 구단으로부터 임시휴가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유배성 단기유학을 떠나게 된다. 후기리그 시작과 함께 허구연 감독은 다시 팀에 복귀했으나, 청보는 여전히 7217패의 성적으로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상대팀들이 청보 만큼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며 무조건 에이스급 투수들의 로테이션을 청보전에 몰아 맞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재미있는 선진야구를 선보이겠다며 야심 차게 등장했으나, 결국 동네북으로 전락한 허구연 감독은 결국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백기를 들게 된다. 허구연 체제에서 남긴 성적은 15240패 승률 0.263에 불과했고, 57게임만에 경질된 것은 삼미의 창단감독을 맡았던 박현식(13게임)에 이어 역대 최단명 감독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후 허구연은 1987~1989년까지 롯데에서 코치로 일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방송해설자로 전념하게 된다. 본인에게나 한국야구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현명한 길을 찾은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카리스마이순철(LG, 2004~2006)

 

선수로서 위대한 캡틴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도 훌륭한 감독이 되지는 못했다. 해태 시절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이자 군기반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순철 감독은, 2000년대 암흑기에 접어들던 LG의 리빌딩을 이끌 해결사로 등장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철 시대는 엘롯기 시대로 대표되는 LG의 암흑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부작용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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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야구와 개인주의 전통이 강한 LG와 전혀 다른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는 해태 시절에 젖어있던 이순철 감독의 궁합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이순철호는 임기 내내 단 한번도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2004(59 4 70) 2005(54 1 71)은 모두 6위에 그쳤고, 2006년에도 시즌 중 중도퇴진하기 전까지의 성적이 16 1 19패로 7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이 정도에 그쳤다면, LG 팬들로부터 그토록 원망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순철 감독이 임기 동안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고 LG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하나 둘씩 팀을 불명예스럽게 떠나는 일이 빚어지면서 팬들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에 이르기까지 90년대 LG의 전성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선수들은 모두 이순철 감독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석연찮게 팀을 떠나거나 아예 유니폼을 벗었다.

 

자진 사퇴 직전에는 홈 구장에 감독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대미문의 플래카드가 내걸리기도 했다. 이순철 감독에 대한 팬들의 실망과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순철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 LG의 팀 개혁이 사실은 대부분 프런트의 의지였고 이순철 감독은 결국 중간에 낀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동정여론이 불거지면서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준비되지 못한 감독쇠락해가던 구제불능 팀간의 잘못된 만남이었던 셈이다. 해설자로 변신한 이순철은 지도자시절 못다 푼 스트레스를 방송마이크를 통해 내뿜는 특유의 독설로 해소하고 있는 중이다.

 

금지된 그 이름백인천(롯데, 2002~2003)

 

만일 당신이 사직구장 관중석에서 멋모르고 백인천이나 골프같은 금기어를 잘못 입에 담는다면? 아마 원치 않게 뜯다 만 닭다리나 뜨끈한 국물이 담긴 사발면 그릇을 면상으로 영접하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부산팬들에게 백인천이라는 이름은 군대 시절 고참보다도 더 떠올리기 싫은 금기어다. 사실 처음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현역시절 한국야구의 레전드였고, 감독으로서도 90 LG의 우승을 이끄는 등, 백인천은 스타출신 감독의 성공사례로 거론되었던 인물이었다. 한국야구의 타격이론을 재정립한 인물로 꼽히며 90년대까지만 해도 시대를 앞서간 야구인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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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풍부하던 연륜와 열정은 90년대에 다 남겨두고 왔는지 롯데에서의 지도자 말년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팀 개혁을 명분 삼아 선수들의 타격폼을 자신의 이론대로 일괄적인 수정을 강요하는가 하면, 이대호에게 혹독한 체중감량을 지시하여 무릎과 다리에 부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 외국인 선수를 직접 관리하겠다며 영입을 주도한 선수들은 모두 수준미달로 판명되며 줄줄이 조기퇴출 되었고, 문동환, 손민한, 이대호 등 팀 내 유망주와 간판선수들을 모두 트레이드 하려다가 롯데 팬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군 선수들의 이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잦은 외유를 일삼으며 팀 관리에 소홀히 하는 등, 연이은 기행과 태업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롯데 구단이 알려진 것과 달리 백인천 감독의 팀 개혁에 대하여 투자와 지원에 소홀했고, 소위 잦은 기행도 악의적인 언론보도에 의하여 실제보다 부풀려진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시절 롯데가 16연패 포함 매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경기내용 또한 최악을 달렸던 것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선수기용과 팀 개편 등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롯데가 로이스터 감독 체제 이후 포스트시즌 단골손님으로 부활하면서 백인천 감독은 그때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대호나 롯데도 있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글쎄…? 이건 달리 말해 원균이 칠천량에서 삼도수군을 말아먹은 덕에, 훗날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더 빛날 수 있었다.”는 주장과 비교해 논리구조에서 대체 뭐가 다른 것일까?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티스토리 뉴스뱅크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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