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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72

야구 한류, 한국 야구의 높아진 위상과 책임감 국내 프로야구 출신으로 일본무대에 진출한 한국 선수 1호는 선동열이었다. 당시만해도 해외진출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고, 한국 선수들에게 일본야구란 그야말로 꿈의 무대와도 같았다. 선동열은 당시 이미 국내무대를 완벽하게 평정하며 ‘국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독보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야심차게 도전한 일본무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니치 유니폼을 입은 선동열은 데뷔 첫해이던 1996시즌 5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5.50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쳤고, 한때 2군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감독은 선동열에게 “그런 식으로 할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호된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선동열은 이후 이를 악물고 절치부심하여 이듬해 일본무대 최고의 마무리투.. 2011. 2. 27.
일본 진출한 한국 투수들, 첫해는 고전한다? 야구에도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성공한 한국인 선수들의 해외 진출무대로 최근 각광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 프로야구다. 많은 선수들이 국내보다 훨씬 좋은 야구환경에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풍족한 대우가 보장되는 일본야구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현해탄을 건넜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는 외국인, 특히 한국 선수들에게는 결코 호락호락한 무대가 아니었다. 내노라는 빅리그 경력을 자랑하는 선수들도 일본무대를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치고 떠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한국 선수들에게도 쉬운 무대일 리 없다. 특히 진출 첫해인 데뷔 시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이다. 1996년 일본에 진출해 센트럴리그 주니치 드래곤스 소속으로 마운드에 오른.. 2011. 2. 13.
박찬호-이승엽, 살아있는 두 전설의 만남 박찬호와 이승엽(이상 오릭스 버팔로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야구사를 거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투-타의 두 거물이다. 투수와 타자로서 포지션도 달랐고, 박찬호는 미국에서, 이승엽은 한국과 일본서 선수생활의 전성기를 보내는 등 서로 활약한 무대도 달랐지만, 알고 보면 두 사람의 야구인생 궤적은 전성기에서 위기와 극복에 이르기까지 은근히 닮은 구석이 많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는 풀타임 빅리거가 된 96년부터 다저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1년까지 80승을 달성했고, 5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성장했다. 이승엽도 삼성에서 보낸 96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승승장구하며 아시아 홈런 신기록(56개)을 갈아치우는.. 2011. 2. 2.
제2의 박찬호-추신수가 나올 수 있을까? 박찬호가 1994년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고 LA 다저스와 계약한 이래,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전성시대였다. 유망주들의 해외진출 붐이 절정에 달한 1999년에는 김병현, 송승준(롯데), 최희섭(KIA), 오철희, 권윤민(KIA 스카우트), 서정민 등 무려 6명이 한꺼번에 MLB 구단으로 직행하며 그야말로 호황을 누렸다. 이 기간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이 남긴 성과도 화려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첫 테이프를 끊은 박찬호는 리그 최고의 우완 선발투수로 성장하며 전성기를 보냈고, 김병현은 한국인 최초로 월드시리즈 우승멤버에 이름을 올렸다. 이 밖에도 봉중근, 조진호, 최희섭, 서재응, 류제국, 구대성 등이 대한민국 국적을 달고 빅리그를 누볐다. 메이저리그에서 한.. 2011.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