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씨 좋은 호움런 왕』
처음에는 옛날에 어떤 나라에 ‘호움런’ 이라는 이름을 가진 착한 마음씨의 어떤 왕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10살짜리가 저런 제목을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당연히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대부분 어린이들이 그렇듯 익숙한 이름의 위인들에 관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저 책을 겨우 펴보았다.
책을 읽기 시작한지 5분도 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저 ‘호움런’ 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 ‘홈런’ 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홈런왕의 이름은 ‘베이브 루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메이져리그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이 바로 저 때였다.
그 책 속에는 약 60년쯤 전에(당시 기준으로) 미국에는 홈런을 굉장히 많이 쳤던 ‘베이브 루스’라는 유명한 야구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는 야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너무 좋아서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내용과 함께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베이브 루스의 열렬할 팬인 한 어린이가 병에 걸려 입원해서 병상에 누워있자, 소식을 들은 루스가 병문안을 가서 아이를 격려하며 소원을 물어본다. 아이는 자신의 우상에게 오늘 밤 경기에서 꼭 홈런을 쳐달라고 말하고, 루스는 그 아이에게 두 개의 홈런을 쳐주겠노라 약속한다.
그리고 그 날 밤 경기에서 루스는 정말 2개의 홈런을 쳤고, 이 어린 팬은 거기에서 용기를 얻어 병마를 이겨냈다는 훈훈한 미담이 바로 이 위인전(?)에 담겨 있는 내용의 핵심이었다.
그렇다. 베이브 루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메이져리그 팬이라면 콧웃음을 치고도 남을 내용이 바로 위인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어린 필자를 현혹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메이져리그의 매력에 빠진 필자가 알게 된 베이브 루스는 ‘마음씨 좋은’ 이라는 표현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위인전 속의 ‘예고 홈런’의 전말을 알게 된 후에는 어린 마음에 막연히 동경했던 먼 나라의 홈런왕에 대한 환상이 산산조각 남과 동시에, 어린이에게 잘못된 내용을 전달 해준 책의 제작자와 작가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이 희대의 사기극(?)인 ‘베이브 루스의 예고홈런’ 에 관한 전말을 소개하려 한다.
때는 1932년, 베이브 루스가 이끄는 뉴욕 양키스는 시카고 컵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다. 좋게 표현하면 열광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심하게 극성스런 팬을 보유한 시카고는 양키스 선수들에게는 정말 지옥 같은 동네나 다름없었다. 특히 베이브 루스에겐 더더욱.
"어이, 대왕 원숭이! 마누라랑 털 골라주기 하다 나왔나?? 흐흐흐"
"살 좀 빼는 것이 어때?? 뱃살은 접혀서 티셔츠 씹고 있고, 엉덩이도 바지를 먹고 있잖아~ 응?? 크하하"
부인과 호텔을 드나들 때마다 자신들을 욕하고 놀리는 시카고 주민들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애써 무시(?)하고 있던 우리의 빅 멍키(루스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 가는 곳곳마다 이런 야유와 비난에 시달렸으니 베이브 루스가 시카고라는 도시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이에 분노했음인가? 1932년 10월 1일 월드 시리즈 3차전 시합에서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하나 터뜨리고 만다. 시리즈는 2-0으로 양키스가 앞서가던 상황이었고, 컵스의 3차전 선발투수는 그 해 3.58의 방어율로 15승을 거둔 찰리 루트(Charley Root 통산 201승 방어율 3.59)였다.
1회 초가 시작됨과 동시에 에러와 볼넷이 연속해서 나오며 무사 주자 1,2루의 위기 상황. 여기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3번 타자 루스는 선제 3점 홈런을 때리며 시카고 팬들을 자극한다. 리글리 필드를 가득채운 시카고 팬들로 부터 듣고 있기조차 힘들 정도의 야유와 욕지거리를 한 몸에 받으며 베이스를 도는 베이브 루스.
"좀 더 빨리 뛰란 말이야~!! 해 넘어가잖아!! 나 참, 돼지가 홈런 하나 쳤다고 거들먹거리긴"
"저 놈은 아마 홈런 못 치면 1루도 못 밟아보고 아웃될걸?? 지난번에는 펜스를 직격하는 타구 날리고도 1루에서 아웃 되더라니깐! 크하하"
3:0으로 쉽게 출발하는 듯 했으나 그 뒤 동점을 허용하며 4:4 인 상황에서 맞은 5회, 루스가 다시 등장하자 관중들과 컵스 벤치에서 내뱉는 야유와 욕설은 거의 극에 달했다. 하지만 루스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며 승부에만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초구 스트라이크,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볼, 네 번째는 다시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 2-2의 상황에서 또 다시 야유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어이~ 대왕 원숭이~~ 한번 크게 헛스윙 해보라구~~ 우~~"
게다가 컵스 덕아웃에서 조차도
"바보 원숭이 녀석, 서커스단이나 찾아가지 왜 여기 와서 난리야. 에이..."
더 이상 참지 못한 루스가 갑자기 팔을 휘두르며 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물론 시끄러운 야유 소리 때문에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루스의 팀 동료였던, 루 게릭이 말하기를
"루스가 찰리 루트에게 이렇게 소리치더군요. ‘기다려라, 네 녀석이 던지는 다음 공을 날려서 그 목구멍에다 날려주마!!’ 와우, 엄청나게 터프하던데요?"
그러고 나서 베이브 루스는 컵스의 덕아웃과 찰리 루트, 그리고 그의 뒤쪽 센터 방향 관중석을 순서대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리곤 약속(?)대로 다음 투구를 힘껏 받아쳤고, 그 타구는 그 당시까지 리글리 필드에서 나온 홈런 중 가장 큰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하게 루스가 가리킨 그 방향으로 날아갔다.
예고 홈런 이었다. 경기장은 난리가 났고, 이어지는 루 게릭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한 루트는 마운드에서 내려와야만 했고, 경기는 결국 양키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각 언론마다 루스가 예고 홈런을 쳤다며 떠들어 댔고, 그런 상황 속에서 월드시리즈는 4-0 양키스의 우승으로 끝났다.
당시 경기장에는 루즈벨트 대통령도 있었는데, 베이스를 도는 루스를 기립(?)박수로 맞아주며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암, 운이 좋고말고."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반면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의 자료 화면이 되어버린 찰리 루트는,
"절대로 루스가 홈런을 예고한 적은 없다. 만약 그가 그런 건방진 짓을 했었다면 그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졌을 것이다."
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나중에 이 일을 "베이브 루스 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하겠다며 도와달라고 요청한 영화사의 제의조차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고 한다. 당시까지는 베이브 루스를 존경함을 넘어서 거의 신봉하는 수준이었던 루 게릭(그 시절은 루스와 게릭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이었다)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루스의 예고 홈런을 믿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진위를 물어봐도
"당신들 베이브의 능력을 몰라서 묻는 겁니까? 분명히 홈런을 예고했고 그 방향으로 정확히 보내버렸다니깐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사자인 베이브 루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신문에 난거나 보시오. 거기에 사건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으니깐.(으쓱~)"
필자가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의 내용은 모두가 영화사에서 지어낸 사실 무근의 이야기이고, 지금까지의 내용이 실제 예고 홈런 사건의 전말이라고 하는데, 사건의 실존여부는 미국 내에서도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당시 경기장에 있던 한 관중이 16미리 프레임으로 찍은 홈비디오를 본적이 있는데, 루스가 왼손에 방망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찰리 루트를 가리키며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얼핏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정말 그 동작이 자신이 홈런을 날릴 지점을 가리키는 예고 액션이었는지 아닌지는, 지금은 땅속에 묻혀있는 “마음씨 좋은 호움런 왕”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