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진의 꽃 보다 야구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의 부활을 꿈꾸다!

by 카이져 김홍석 2011. 2. 1.



삼성 라이온스에서
FA로 풀린 임창용이 일본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재기에 성공하고, 국민타자 이승엽과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 기록 보유자인 박찬호마저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지금의 현실은 새삼 70년대에 태어난 선수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들은 대부분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이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을 이끌었던 주축 선수들이었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하 WBC) 2009년 제2회 대회에서도 대표팀의 맏형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미 30대 중반을 넘은 노장 선수들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투수와 타자로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0대 후반이 지난 야구팬이라면 에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거쳐 보스턴 레드삭스, 콜로라도 로키스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한국형 핵잠수함김병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70년대생 선수들의 막내격인 김병현(79년생)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무대 진출을 선언했다.

 

2007년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종적을 감춘 그였기에, 그의 일본 진출은 많은 야구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지난 30, 김병현은 그의 새 소속팀인 라쿠덴 골든이글스에서 입단식을 갖는 것으로써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막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실시된 입단 테스트에서 기록된 빠른 볼의 최고 구속이 시속 130km대에 머무는 등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호시노 감독은 그의 재기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계약 조건도 1년 총액 3,300만엔( 44,700만원)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 무대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는 다섯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 모두가 한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는 점에서 팬들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초특급 유망주

 

김병현은 고교 시절부터 남다른 비범함을 자랑했던 특급 유망주였다. 광주일고 시절이었던 1995년 청룡기 대회에서 2학년 선수로는 드물게 최우수 선수(MVP)에 선정된 것을 비롯, 같은 해 열린 보스턴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듬해 열린 쿠바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도 경험을 쌓았던 김병현은 졸업 이후 성균관대학교로 진학, 대학 무대에서도 범상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거칠 것 없이 명성을 날리던 그는 2학년이던 19987, 한미대학선수권에서 미국의 대학 대표팀을 상대로 6.2이닝 동안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놀라운 피칭을 선보였다. 사이드 암으로 시속 150km를 웃도는 공을 연거푸 뿌려대니 미국 대학의 올스타급 타자들도 연신 헛방망이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후 그 해 가을에 열린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박찬호를 비롯한 프로 선수들이 대거 참가해 나중에 드림팀 이라 불리게 되는 당시 야구대표팀에 전격적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는 4회부터 구원 등판해 8연속 삼진을 잡아내는 등 6이닝 동안 12탈삼진 퍼펙트를 기록, 부끄럽지 않은 활약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병역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한미대학선수권 당시부터 김병현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터들은 박찬호가 참가하여 화제가 되었던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명의 보석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김병현은 당시로서 메이저리그 역대 6위에 해당하는 225만 달러의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했다. 그의 본격적인 성공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메이저리그를 즐겨 보는 야구팬들이 지금도 여전히 김병현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처럼 김병현이 가능성 높은 유망주였고, 또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부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병현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도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김병현은 마이너리그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겨우 2달만에 빅리그의 부름을 받았고, 1999 5 29일 뉴욕 메츠와의 원정경기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케네디 스코어라 불리는 8-7 한 점 차로 리드한 상황에서의 9회말 등판, 그 긴박한 상황에서 빅리그 등판이 처음인 이 20살의 애송이는 아무런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특유의 썩소를 날리며 당대 최고의 타자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데뷔전을 1이닝 퍼펙트 세이브로 장식한 이 당찬 신인을 향한 스포트라이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듬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활약하게 된 김병현은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애리조나의 핵심전력으로 활약했다. 2001년에는 98이닝 동안 무려 113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등 5 6 19세이브 평균자책점 2.94라는 빼어난 기록을 남겼고, 소속팀 애리조나의 월드시리즈 진출에도 공헌했다.

 

비록 월드시리즈에서 데릭 지터와 스캇 브로셔스에게 이틀 연속 9회말 극적인 동점 홈런을 허용하며 마운드 위에 주저앉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팬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병현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차지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당시 22세에 불과했던 그의 나이를 고려하였을 때, 그는 분명 장차 메이저리그를 호령할 수 있는특급 유망주임에 틀림 없었다.

 

선발을 향한 꿈과 부상, 그리고 구설수

 

2002년 김병현은 팀의 주전 마무리로 맹활약하며 2.04의 평균자책점으로 36세이브를 기록했다메이저리그 역사상 김병현 만큼 어린 나이에 마무리로 성공한 케이스는 극히 드물었고, 그는 전문가들로부터 향후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리그 최정상급 마무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김병현의 꿈은 마무리가 아닌 선발투수였고, 그걸 두고 구단과의 마찰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애리조나는 2003시즌 중반에 김병현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했고, 2003년까지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좋은 성적(9 10 16세이브 3.31)을 거뒀지만, ‘한국형 핵잠수함김병현의 전성기는 사실상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때를 끝으로 김병현은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구위를 가질 수 없었다. 야구장 안팎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악몽 같은 부상이 한꺼번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보스턴에서는손가락 욕설 사건으로 구설수에 오르더니, 국내에서는사진기자 폭행 사건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부상까지 찾아오면서 2004년에는 7경기 등판에 그쳤다. 보스턴이 86년만의 우승을 일궈내면서 김병현도 두 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지만, 사실 그 우승에 김병현이 공헌한 바는 거의 없었다.

 

2005년부터 보스턴을 떠나 콜로라도 로키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김병현도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쿠어스 필드를 극복할 순 없었다. 그나마 가장 좋았던 2005년의 성적도 5 12패 평균자책점 4.86에 그쳤다. 8 12패 평균자책점 5.57을 기록한 2006년을 거쳐 2007년에는 콜로라도와 플로리다, 에리조나 등 무려 세 개 팀을 전전하며 개인 통산 첫 시즌 10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평균자책점은 6.08에 이르렀다.

 

이후 김병현은 피츠버그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는 등 재기를 꿈꿨으나, 시즌 개막 직전 방출 통보를 받으며 끝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운 행보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2009년 제2 WBC를 앞두고 실로 오랜 만에 김병현의 이름이 거론됐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김인식 감독이 김병현의 합류를 원했고, 김병현 역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즉각 대표팀에 합류할 뜻을 내비쳤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 엔트리 결정을 앞두고여권 분실 소동으로 대표팀 훈련에 합류하지 못했던 그는 끝내 태극마크를 다는 데 실패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또 다시 한 동안 잊혀졌다. 샌프란시스코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기도 하고, 독립리그를 전전했다는 뒷이야기만 가끔 들려올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오랜만에 다시 한국의 야구팬들 앞에 나타났다. 공식적으로는 2009 WBC 예비 엔트리 발표 이후 2년만이었다. 그의 행보를 주시하던 라쿠덴 호시노 감독의 적극적인 추천 덕분이었다. 호시노 감독은 언론을 통하여 “(김병현이) 후지카와보다 낫다.”며 김병현을 적극적으로 추켜세워주기까지 했다.

 

메이저리그를 평정할 만한 재주를 지녔던 그가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안타깝게 보일 수 있지만, 어쨌든 김병현의 라쿠텐 입단은 그의 선수 생명을 건 또 다른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BK’라는 애칭을 지녔던 그가 일본 무대에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올 시즌 일본야구를 관전하는 또 다른 재미가 될 전망이다. 아무쪼록 한국형 핵잠수함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 본다.

 

// 유진 김현희 & 카이져 김홍석[사진=홍순국의 순 스포츠, 라쿠텐 골든이글스]

 

티스토리 초대장이 필요한 분은 댓글로 E-Mail 주소를 남겨주세요~
로그인도 필요 없는 추천 한 방(아래 손 모양), 아끼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