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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신용불량에서 벗어나다...

by 카이져 김홍석 2008. 7. 26.
이제 와서야 밝히는 거지만 그동안 나는 신용불량자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출받은 돈을 갚지 못했으니까. 아, 다행히도 사채는 아니었다.

1997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당시, 수능을 일주일 정도 앞둔 상황에서 크나큰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IMF시대라는 찬바람이 불어온 것이었다. 그 당시 수많은 가정이 그러했듯, 우리 집의 경제사정도 위기로 내몰렸고, 나는 도전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지방 국립대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작은(아주 작은)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빚은 늘어만 갔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족원 모두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개인 사업자였던 아버지는 미수금을 갚아야했지만, 아버지에게 미수금을 가지고 있었던 좀 더 큰 회사들은 파산선고와 동시에 그나마 남은 건더기는 더 큰 회사들이 가져갔다. 쉽게 말해 100만원의 빚은 갚아야했지만, 1000만원의 받을 돈은 받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생긴 빚은 다행히도 눈덩이처럼 불진 않았지만, 줄여나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나는 수능을 치고 3주 후부터 바로 과외를 시작해야만 했고, 대학을 다니는 와중에도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 살 터울인 여동생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동네 조그마한 학원에 강사로 일을 했다. (4년 내내 맘 놓고 저녁에 놀러 가지도 못하고 학교와 학원을 오갔던 동생이 무척 대견했다.)

아버지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가셔야했고, 그렇게 모은 돈은 빚을 줄이는 데 사용되었다. 나와 동생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학비와 용돈을 충당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생활비가 모자랄 수밖에...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내린 결정은 학자금 대출이었다. 자녀 두 명이 대학생 신분이었기에 비교적 싼 이자의 학자금 대출은 좋은 방법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시간이 흐른 후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빚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다시 집(부산)으로 내려오셨고, 택시 기사로 일하고 계신다. 이제 모든 것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2년 전 예상치 못한 전화 한통이 걸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6년, 그러니까 내가 28살이었던 해의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H캐피탈이라는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학자금을 갚지 않아 내가 신용불량자로 등록이 되었고, 조만간 법적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최종 경고였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놀란 마음에 조회를 해봤더니, H캐피탈 말고 L캐피탈에도 갚지 않은 학자금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 곳 모두의 조치로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고 말았다. 한 곳에 500만원씩 합계 1000만원이었던 대출금은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1700만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불어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에는 막막함 보다는 온갖 짜증이 먼저 느껴졌었다...

“젠장... 이건 또 뭐야...”

개인 사정으로 이런 저런 길을 멀리 돌아온 나는 여전히 학생신분이었다. 천만 원이 넘는 돈은 쉽게 생각할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겨우겨우 사정을 하고 할부로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기로 합의를 봤다. 다행히 법적인 조치(차압 등)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를 뗄 수는 없었다.

그 때부터 신용불량자로서의 조금은 힘겹고 억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내가 신용불량자구나...’라는 사실을 가장 절실히 느꼈던 것은 핸드폰을 바꾸기 위해 대리점에 들렀을 때였다.

나는 20살 때 내가 직접 번 돈으로 핸드폰을 장만한 이후 28살 때까지 단 한 번도 통신사를 바꾼 적이 없었다. 8년 동안 한 곳만을 이용한 고객. 그리고 요금을 못 내거나 해서 그 쪽 직원의 속을 썩인 적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 돈을 벌었으니까...

마음에 드는 핸드폰을 고르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분할 납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직원이 몇 가지 조회를 해보더니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이유는 내가 신용불량자였기 때문이라나? 살짝 기가 막혔다. 8년 동안 한 통신사만을 이용했고, 그 쪽과의 신용관계에서 한 번도 내 의무(요금납부)를 다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그런 비슷한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괜시리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고, 청승떠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으니까...

열심히 일했다... 새벽 4시에 열리는 새벽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그 후에는 노가다도 했고... 그러다가 우연찮은 기회가 찾아와 내 꿈이기도 한 ‘기자’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 덕에 빚을 점점 줄여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2008년 7월, L캐피탈의 마지막 대금을 치르고 나서 나는 드디어 ‘자유인’이 되었다.

서른이 되어서야 겨우 맛본 이 감격.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분들도 많겠지만, 어쨌건 내 20대를 항상 괴롭혀왔던 ‘돈(빚)’이라는 괴물의 마수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무척 만족스럽다.

이젠 내가 하고픈 일들을 조금은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다음 주에는 은행에 들러서 신용카드라는 것을 하나 만들어봐야겠다. 그리고 핸드폰 판매점에 가서 아~~주 좋은 신제품을 고른 후 분할납부로 결재하겠다고 말해볼까? 아직 기록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서 또 다시 거절당할 지도 모르지만... (<--  댓글을 읽어보니 감사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많으시네요. 나름대로는 유머라고 던진 농담입니다만... 글 솜씨가 부족해서 이해하기 어려우셨나 보네요. 카드 따윈 만들생각 없답니다. 안심하시길...^^;)

뭐 어때? 난 이제 모든 것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데...


내 나이 서른. 내 인생의 새로운 비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