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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레드삭스를 빛낸 선수들 BEST 5

by 카이져 김홍석 2007. 12. 4.

2007년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해였다. 정규 시즌 승률 1위(클리블랜드와 공동) 팀으로서 월드시리즈까지 재패한 그들은 이견이 없는 현 메이저리그 최강팀이다.

2004년 이후 3년 만에 챔피언 트로피를 탈환하며 21세기 들어 2회 우승을 한 최초의 팀이 된 보스턴.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밤비노의 저주’에 시달리던 레드삭스는 3년 전의 우승이 1918년 이후 무려 86년 만에 맛본 감동이었다.

1901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해 107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보스턴. 한세기가 넘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레드삭스’라는 이름을 가장 빛낸 선수들을 소개해 본다. 일단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매니 라미레즈 등을 비롯한 현역 선수는 제외하도록 한다.


▷ 칼 야스츠렘스키(1961~83)

1961년에 데뷔해 83년 은퇴할 때까지 2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452홈런 1844타점 1816득점의 어마어마한 성적을 남기는 동안 오로지 레드삭스 유니폼만 입고 뛰었던 단 한 사람. 팀 통산 홈런 2위, 타점과 득점 1위에 올라 있는 보스턴의 진정한 레전드. 1967년 44홈런 121타점 3할 2푼 6리의 타율로 역사상 마지막 타격 3관왕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는 기록의 사나이.

1989년 후보로 오르자마자 94.64%라는 당시 역대 6위의 득표율(현재는 14위)로 명예의 전당에 레드삭스 유니폼과 함께 헌액된 선수. 하지만 23년의 세월 동안 이를 악물고 도전한 2번의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패하며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은퇴한 레드삭스의 전설. 이것이 오직 보스턴맨으로만 남았던 칼 야스츠렘스키가 걸어왔던 길이다.

2004년 보스턴은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1차전의 시구를 이 레드삭스의 전설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들은 파죽의 4연승으로 86년의 한을 풀며 그들의 전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번 2007년 월드시리즈의 1차전 시구자도 다름 아닌 바로 칼. 레드삭스는 다시 한 번 콜로라도 로키스를 4연승으로 제압하며 21세기 최고의 팀으로 자리매김 했다.

테드 윌리암스와는 달리 팀 동료와 팬들 모두에게 사랑받던 진정한 ‘프로선수 야즈(야스츠렘스키의 애칭)’의 8번은 팀의 5개의 영구 결번 중 하나로 남아있다. 아마도 68세의 야스츠렘스키가 생존하는 한, 펜웨이 파크에서 열리는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첫 번째 경기의 시구자는 항상 칼 야스츠렘스키일 것이다.


▷ 베이브 루스(1914~19)

뉴욕 양키스의 상징과도 같은 베이브 루스가 웬 말이겠느냐 만은, 레드삭스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그다. 루스가 원래 레드삭스 출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밤비노’는 베이브 루스의 별명이었고, 1920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인 125,000달러에 그를 양키스로 팔아버린 이후 매번 우승에 실패하면서 생겨난 말이 ‘밤비노의 저주’다.

올시즌 보스턴의 에이스 자쉬 베켓은 LA 에인절스와의 포스트 시즌 개막전에서 완봉을 거두었다. 보스턴 선수로서 무려 89년 만에 있었던 대사건이었으며, 베켓 이전에 같은 기록을 가지고 있던 보스턴 투수가 바로 베이브 루스였다. 그는 1918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 등판해 상대 시카고 컵스를 6피안타 완봉승으로 제압했다. 4차전까지 8이닝 2실점의 빼어난 투구로 월드시리즈에서만 2승을 챙긴 그는 보스턴의 20세기 마지막 우승의 1등 공신이었다.

양키스로 이적한 뒤에는 거의 타자로서만 활약했었지만, 루스는 원래 처음부터 투수로 보스턴에 입단했다.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있을 당시의 투수 루스는 158경기에 등판해 1190.1이닝을 던지는 동안 89승 46패 방어율 2.19를 기록했고, 107회의 완투와 17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심지어 월드시리즈 29.2이닝 무실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홈런왕 루스’는 기억해도 역대 방어율 랭킹 14위(2.28)에 랭크되어 있으며, 1916년 리그 방어율 1위의 ‘투수 베이브 루스’는 잘 모르는 편이다. 물론 투수로 뛰면서도 루스는 1918년과 19년 연거푸 리그 홈런왕에 등극했고, 특히나 1919년의 29홈런은 당시 신기록이었을 정도로 타격에도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이 기록은 루스 자신에 의해 20년 54개, 21년 59개, 27년 60개로 3차례 더 경신된다)

루스가 레드삭스를 빛낸 선수로서 어울리는 지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 레드삭스를 거처간 유명한 선수들 중에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루스 말고는 아무도 없다.


▷ 사이 영(1901~08)

327경기 2728.1이닝 192승 112패 방어율 2.00 그리고 275완투와 38완봉승, 역대 최다승(511승)의 주인공인 사이 영이 신생팀 보스턴에서 단 8년 만에 이룩한 업적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그에 관해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03년 월드시리즈에서 영은 1차전 선발 투수로 나와 비록 패했지만, 5차전과 7차전을 연거푸 완투승으로 잡아내며 팀에 창단 이후 첫 번째 우승을 안겼다. 이듬해 5월 5일에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일구어 내기도 했다. 2번의 30승 시즌 등 보스턴에서만 6번의 20승 시즌을 보낸 그는 팀 역사상 다승과 완투-완봉 부문에서 1위에 올라 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최다패 기록은 작년시즌 팀 웨이크필드(보스턴 통산 134패)가 경신했다.


▷ 테드 윌리암스(1939~60)

반올림한 4할 타율은 싫다며 더블헤더로 열렸던 시즌 마지막 경기에 모두 출장해 6안타를 몰아치며 4할 6리의 타율을 기록, 마지막 4할 타자로 유명한 테드 윌리암스도 레드삭스에 평생을 바친 선수다. 물론 이 에피소드에는 널리 알려진 드라마와는 조금은 다른 뒷이야기가 숨어있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던 테드는 감독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날 경기 역시 ‘자신의 대기록과 자존심’을 위해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한바탕 설전을 벌인 뒤 경기에 출장한 것이었다. 물론 좋은 결과로 보여주었으니, 또 한 명의 레드삭스의 전설적인 선수 겸 감독 조 크로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크로닌의 4번도 영구 결번이다)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야 더 잘한다고 믿었으며, 그 때문에 팬과 언론을 적으로 돌린 특이한 선수였다. 2번의 MVP를 수상하기는 했으나, 4번이나 2위에 그쳤던 것도 언론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결정적이었다. 언론과의 관계가 나쁜 선수는 종종 있었으나, 지역 팬들과의 관계까지 테드만큼 나빴던 선수는 정말로 드물었다.

은퇴 경기 때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커튼콜을 원하던 관중들을 외면한 채 덕아웃으로 들어가 버렸고, “보스턴의 팬들은 지긋지긋하다. 난 매일 이곳에서 트레이드 되는 꿈을 꾼다.” 는 등의 발언으로 홈팬들을 분노케 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사냥 연습을 위해 신성한(?) 펜웨이 파크에서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던 괴짜 테드 윌리암스. 그런 그이지만 보스턴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결코 빼놓지 말아야 할 선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테드의 경력 중 특이한 것은 역시나 2차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해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야구만큼이나 조종 실력이 뛰어났던 것인지 그는 두 번 모두 무사히 귀환해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한창 전성기이던 시절에 5시즌이나 전쟁터를 누볐던 테드 윌리암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통산 521홈런 1839타점 1798득점 .344/.482/.634 라는 화려한 베팅라인을 남겼다.

홈런은 팀 통산 1위의 기록이며 타점과 득점은 2위에 올라있다. 타율-출루율-장타율은 팀내 1위일 뿐 아니라, 역대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에서도 각각 7위, 1위, 2위에 올라 있다. 타율 1위 6번, 홈런과 타점 타이틀도 4회씩 획득했다. 이 3개 부문에서 모두 4번 이상 타이틀을 차지한 선수는 테드 윌리암스가 유일하며, 타격 3관왕을 두 번이나 차지한 선수도 그 외에는 아무도 없다.

성격과 관계없이 그는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명이었음에 틀림없다. 테드는 루스로부터 이어지는 루 게릭-조 디마지오-미키 맨틀의 양키스 전설적인 타자들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으며, 5년의 공백이 없었더라면 ‘역대 최고의 타자’라는 수식어는 베이브 루스가 아닌 테드의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테드도 보스턴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고, 그의 9번은 보스턴의 영구 결번으로 남았다.


▷ 로져 클레멘스(1984~96)

383경기 2776이닝 192승 111패 방어율 3.06 그리고 100완투와 38완봉승,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면 위의 사이 영의 기록과 비교를 해보면 된다.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방어율에서는 차이가 꽤 나는 편이지만 나머지 것들은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 192승과 38완봉승은 영과 동률로 팀 역대 1위의 기록이며, 선발 등판 회수(382번)와 투구 이닝은 프랜차이즈 기록이다.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100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단 10명, 그것도 클레멘스와 영 그리고 웨이크필드(154승)을 제외하면 123승이 최다 기록일 정도로 에이스급 투수가 드물었다. 로져 클레멘스가 등장했을 때, 보스턴의 열성 팬들이 ‘사이 영 이후 80년 만에 나타난 에이스’라 칭송했던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07시즌을 끝으로 이번에야 말로 은퇴할 것처럼 보이는 클레멘스가 보스턴을 빛낸 선수, 그 마지막 주인공이다.

98마일의 무시무시한 패스트볼로 무장한 당당한 체구의 로져 클레멘스는 3년차이던 1986년 방어율(2.48)과 다승(24승)에서 1위를 차지하며 팀을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견인, 사이영상과 리그 MVP를 동시에 석권한다.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3번의 사이영상을 수상한 클레멘스는 명실상부한 빅리그 최고의 에이스였다. 하지만 선배 선수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도 지긋지긋한 저주의 역사를 끊을 힘은 없었다. 유일한 월드시리즈 진출이었던 1986년은 ‘어메이징 메츠’에 무릎을 꿇어야 했고, 이후 3번의 리그 챔피언십에서도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패스트볼의 위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결국 팀은 96시즌 종료와 동시에 FA가 된 클레멘스를 적극적으로 붙잡으려는 생각이 없었고, 클레멘스는 토론토를 거쳐 양키스에 안착한 뒤 2번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클레멘스는 보스턴 팬의 입장에서는 애증의 관계에 있는 선수다. 로져는 2번의 한 경기 20탈삼진 경기 등 항상 멋진 투구로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보스턴 팬들은 클레멘스가 함께 하는 한 언젠가 밤비노의 저주는 깨질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숙적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그 후로는 언론을 통한 좋지 않은 설전이 지루하게 이어지며 그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펜웨이 파크에서 열렸던 올시즌 경기에서 보스턴 팬들은 로져 클레멘스를 상대로 많은 점수를 뽑아내자, "로저 클레멘스는 어디 있는가(Where is Roger)?“라며 그를 조롱했다.

결국 로져 클레멘스가 명예의 전당에 입고 들어갈 유니폼은 베이브 루스처럼 레드삭스가 아닌 양키스 유니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이 영과 함께 레드삭스를 대표하는 역대 최고의 우완 에이스로서 레드삭스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