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재미없는 가정을 하나 해보자.
시험 때마다 터져 나오는 컨닝에 대한 문제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국가에서 새로운 법 조항을 추가해 2008년 1월부터 컨닝을 하다 걸리는 학생들은 미성년자의 경우는 무조건 퇴학을, 성인의 경우는 1년의 징역을 선고 받게끔 결정되었다고 하자.
그와 더불어 컨닝의 뿌리를 완전히 뽑기 위해 과거에 컨닝을 했던 학생들을 치밀하고도 오랜 조사 끝에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확보한 뒤, 그 명단을 언론에 공개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 명단을 공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도 새로 정한 법에 따라서 동일한 처벌을 가하겠다면? 아니 앞으로 생길 컨닝을 방지하기 위해 더욱 엄한 처벌을 가하겠다고 하면 그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정의 현실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만의 하나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코미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사회를 전복시킬 정도의 엄청난 범죄이거나 사람의 생명을 멋대로 좌지우지 한 경우가 아니라면 새로이 제정된 법령을 과거에까지 소급시켜 적용하는 경우는 없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불과하다.
메이저리그에 크나큰 파장을 몰고 온 ‘미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작년 3월에 조지 미첼 전 민주당 상원위원을 위원장으로 위촉하여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근육 강화제와 성장 호르몬에 관련된 선수들을 조사하던 ‘미첼 위원회’가 드디어 그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다.
이미 홀로 집중 포화를 당하고 있던 배리 본즈를 비롯해 로저 클레멘스, 앤디 페티트, 게리 셰필드 등의 현역 메이저리거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아래는 80명이 넘는 선수들 중 한국 팬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주요 선수들만 추려본 명단이다.
현역 - 배리 본즈, 잭 커스트, 앤디 페티트, 로저 클레멘스, 미겔 테하다, 게리 셰필드, 제이슨 지암비, 마이크 스탠튼, 폴 로두카, 페르난도 비냐, 에릭 가니에, 브랜든 도넬리, 데릭 턴보우, 릭 엔키엘, 폴 버드, 제이 기번스, 트로이 글로스, 호세 기옌, 게리 매튜스 주니어, 론델 화이트, 브라이언 로버츠,
은퇴 - 케빈 브라운, 켄 케미니티, 라파엘 팔메이로, 호세 칸세코, 토드 헌들리, 척 노블락, 데이빗 저스티스, 모 본, 데니 네이글, 케빈 영, 이스마엘 발데스, 맷 윌리엄스, 스티브 우다드, 베니토 산티아고
꽤나 익숙한 선수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특히 박찬호의 LA 다저스 시절 동료였던 케빈 브라운이나 게리 셰필드, 이스마엘 발데스, 토드 헌들리, 에릭 가니에, 폴 로두카 등도 명단에 올라 있다.
스테로이드가 메이저리그에서 공식적으로 금지약물로 지정된 것은 2005년 1월의 일이었다. 한참이나 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 2003년에 12월에 발코 스캔들(세계 신기록 보유자였던 육상 스타 팀 몽고메리와 매리언 존스, 배리 본즈 등이 제약 회사인 발코로부터 스테로이드를 공급받았다는 사실이 폭로된 사건)로 인해 큰 사건으로 확대되자 그제 서야 뒤늦게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나선 것이었다.
1998년 마크 맥과이어가 근육 강화 호르몬의 일종인 안드로(Androstenedione)를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넘어갔던 것이, 5년 뒤에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진 것이다. ‘스테로이드 전도사’라 불리는 호세 칸세코 등, 극소수의 선수들을 제외하면 이번에 적발된 선수들은 1999년 이후 약물에 노출된 케이스다. 즉, 맥과이어의 엄청난 활약을 보고 자극을 받은 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해뒀다가 그것이 곪아서 터지려 하자 모든 책임을 선수들에게로 돌리려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행태도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여론도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던 98년 당시에 금지 조항을 마련했었더라면, 맥과이어역시도 그 명성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고, 이후의 이런 추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스테로이드 복용과 학생들의 컨닝에는 참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스테로이드나 컨닝 두 가지 모두가 자신의 양심을 속여야 한다는 점, 그 결과로 좀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열심히 훈련 또는 공부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당시에는 적어도 메이저리그에서는 공식적인 금지 조항이 없었기에, 스포츠맨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행위임은 분명하나 불법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바로 적발되면 그에 대한 조취가 취해지지만, 과거에 컨닝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다음 학기에도 또 다시 F 학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단에 오른 선수들에 대한 ‘처벌’을 원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것이 영구 제명이든 일정 경기의 출장 정지든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과거를 그냥 묵과 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이들을 처벌할 것인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선수들이 잘못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분명 그들의 양심을 자신의 명예와 함께 내던졌으며, 팬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아마도 매우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없는 이상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란 불가능할 것이며 딱히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처벌’이다. 법을 어겼을 때 강제적으로 가해지는 바로 그것 말이다.(주 : 미국에는 스테로이드 자체를 주(州)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법’은 어디까지나 메이저리그의 규칙이고, 처벌도 사무국 측에서 가해지는 것만을 뜻한다.)
경범죄에 대한 몇 가지 법령이 제정되기 전까지 거리에서 침을 뱉는 것은 위법이 아니었다. 그것이 법으로 제정 되어 실행되던 그날 한 경찰이 어떤 시민을 보고 “난 이 사람이 어제 침 뱉는 걸 봤습니다.”라며 증언한다고 해서 그에게 벌금이 부과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메이저리그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는 스테로이드와 관련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적발 시에는 각각 50경기와 100경기의 출장 정지 조치를, 세 번째로 적발되었을 경우에는 영구 제명하는 삼진 아웃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앞으로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것이며, 필요에 따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2005년 1월에 발동된 이 조항으로 2004년 까지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선수들을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미첼 보고서는 그 근거 자체를 한 번쯤은 철저히 재검토해 봐야할 필요성이 있다. 미겔 테하다 등을 비롯해 몇몇의 선수들은 그들이 스테로이드 또는 호르몬을 구입한 증거물이 그들의 서명과 함께 적발된 케이스다.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의 경우 과거 그의 코치였던 브라이언 맥나미의 증언만으로 그 명단에 이름이 오른 케이스다. 이러한 것은 비단 클레멘스 혼자만의 경우가 아니다.
게다가 클레멘스는 2005년 이후의 약물 검사에서는 단 한 차례도 양성 반응을 나타낸 적이 없다. 조지 미첼이 이번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이것은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의 보고서는 100% 완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 명단에 오른 선수들은 이미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겼다. 굳이 따로 처벌을 가하거나 그들의 기록을 삭제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앞으로 메이저리그가 존재하는 동안 계속해서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스테로이드 사용 여부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배리 본즈나 로저 클레멘스라 하더라도 명예의 전당 입성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다고 봐야한다. 354승을 거둔 투수와 762개의 홈런을 친 타자가 명예의 전당 멤버에서 그 이름이 빠져 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비웃음거리다. 도박 스캔들로 영구 추방된 통산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 피트 로즈처럼 말이다.
양심을 저버린 자는 그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졌을 때가 가장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법이다. 이미 저 명단에 올라서 세계에 그 이름이 타전된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를 해야 할 이들로서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가족과 자녀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과거의 죄상까지 낱낱히 파헤치겠다고 나서서 그들의 명단을 만천하에 알렸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번 사건은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사무국, 그리고 양심을 지킨 선수들까지도 모두가 명심해야할 하나의 큰 교훈을 준 사건이다. 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스테로이드 사건은 가르쳐 주고 있다. 사무국 측에서 “반드시 처벌하겠다”라고 나서는 것은 그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순히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한 행동일 뿐, 그들 역시도 이번 사건에 대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명단에 이름이 올라온 선수들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확실한 예방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더 많은 선수들이 빛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 메이저리그를 지켜야 한다. 근거도 내세울 수 없는 ‘처벌’에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할 때가 아니라 ‘약물로 오염된 리그’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그러한 시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