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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것들을 잊은 채 살고 있을까...

by 카이져 김홍석 2009. 6. 28.
대학 후배 한 명이 블로그를 하고 있다길래 찾아들어가봤다. 아직 20대 초반인 그의 블로그 속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을 향한 그의 관점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한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몇 개의 포스트를 읽다가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 친구의 모습이 왠지 20대 초중반 그 시절의 나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 그러니까 31살이 되어버린 나는 그 당시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는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대답은... 그래 Yes야
무섭지, 엄청 무섭지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또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근데 말야... 남들도 그래...
남들도 다 사는게 무섭고 힘들고 그렇다고
그렇게 무릎이 벌벌 떨릴 정도로 무서우면서도 한 발 또 한 발
그게 사는거 아니겠니?

- 신해철 crom's techno works <나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되었을 무렵, 내가 신봉(?)했던 마왕 신해철은 영국 유학 이후 자신이 그 동안 불렀던 곡들을 테크노 버전으로 편곡해서 'crom's techno works' 라는 앨범을 냈다. 그 중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곡은 위와 같은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당시 내 마음을 가장 뒤흔들었던 곡이다.

당시 저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20대 청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됐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노래의 중간에는 아래와 같은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이 노래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다. 아직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기억해서 쓸 수 있는 것을 보니, 당시 내가 이 노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실감이 난다.

하지만 난 변했다. 21살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 20대는 남들과 다르리라. 남들이 두려워 하는 도전 앞에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항상 깨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다짐했었다. 하지만 31살이 된 나는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잊고, 내 현실에만 안주하고 내 먹고 살길만 생각하는 시대에 파묻힌 내가 되고 말았다.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나는 이렇게 변했고, 내 속에 살아 숨쉬던 열정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가버린 것일까. 언젠가부터 TV 뉴스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스포츠 뉴스와 스포츠 기사 뿐이다. 내 일과 관련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정작 바라봐야 할 것들을 외면하고 있다.

10대 시절 <삼국지>를 50번 넘게 읽으면서 '제갈공명'을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은 적이 있다. 20대가 되면서는 <로마인 이야기>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데 30대가 된 나에게는 '영웅'이 없다. 닮고 싶고, 따라하고 싶고, 그 열정과 삶을 본받고 싶은 사람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바랐던 모습은 분명 이게 아닌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을 맘에 담고 있어
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야
그의 말투를 따라하며, 그의 행동을 흉내내보기도 해
그가 가진 생각들과, 그의 뒷모습을 가슴속에 세겨두고서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은 너 자신을 믿는데서 시작하는 거야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일일 뿐이야

그대 현실 앞에 한 없이 작아질 때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영웅을 만나요
무릎을 꿇느니 죽음을 택하던 그들
언제나 당신 안의 깊은 곳에 그 영웅들이 잠들어 있어요
그대를 지키며... 그대를 믿으며...

- 넥스트 4집 라젠카 <Hero> 중에서 -
 

마음 속의 영웅을 잃어 버리고, 내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 상실한 나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자기 비애와 상실감 뿐이다. "나는 다르게 살아 갈테야"라고 외쳤던 20대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를 용서하기 더더욱 어렵다.

나는 왜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을까. 이제는 나이가 드신 부모님, 여전히 그분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나 자신, '현실'이라는 보기 좋은 핑계 속에 편승하여 목적 없이 표류하고 있는 내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할 뿐이다. 고작 31살이라는 나이에 현실에 무게에 눌려 내 스스로를 잃어버리다니...

나는 다시 기억해낼 수 있을까...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을...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그 때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을 뿐...


*P.S. 최근 여러가지 이유로 신해철은 사람들에게 많은 욕을 먹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 비난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가 10~20대 시절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노래를 만든 아티스트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끔 내가 '음악도시'를 즐겨 듣던 당시의 신해철과 지금의 신해철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30대 까지 자기 자신을 지켜왔던 그도 40대의 벽은  뚫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10년 후의 내 모습이 더욱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