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페넌트레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가 2위 LG 트윈스를 두 게임차로 간신히 1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3위 쌍방울 레이더스도 2위와 불과 한 게임 반 차에 불과했다. 누가 1위를 차지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1997시즌은 오히려 해태가 4강에 오른 팀들 중에서 가장 처진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LG를 만났다.
당시 ‘객관적인 전력에서 LG가 다소 앞선다’는 평을 받았음에도 불구, 해태는 특유의 근성을 앞세워 1, 3, 4차전을 차례로 가져갔다. 특히, 이종범은 1차전과 3차전에서 무려 세 개의 홈런을 작렬시키며 그 해 30-30클럽을 달성했던 대선수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맞은 5차전에서 김응룡 감독은 20세의 어린 김상진을 과감하게 선발로 등판시켰다. 이쯤 되자 LG도 ‘5차전 만큼은 우리가 가져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상진은 1회 초 공격에서 LG에 한 점을 내 주기는 했지만, 이후 나머지 8이닝 동안 LG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타선에서도 3, 4, 5회 말 공격에서 모두 6점을 뽑아내며, LG 선발 임선동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연소 완투승’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MVP는 이종범에게 돌아갔지만, 김상진 역시 어린 나이답지 않은 배짱 있는 투구로 유지현, 박종호, 서용빈, 심재학 등 당대 최고의 타자들이 모여 있는 LG 타선을 봉쇄 시켰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한국시리즈 한 경기에서 그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배짱을 바탕으로 다음해, 또 그 다음해에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사실 그는 ‘될성부른 나무’였다. 진흥고 졸업과 함께 맞은 첫 해에 풀타임을 소화했던 김상진은 29경기에 등판하며 9승 5패, 방어율 4.29를 마크했기 때문. 신인으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그 해 신인왕은 현대 박재홍(SK 와이번스)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기량은 이듬해에 더 빛이 났다. 30경기에 등판하여 9승 10패 1세이브, 방어율 3.60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제 갓 2년차에 접어든 투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이해에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을 세웠다.
한국시리즈 완투승에 큰 용기를 얻은 그는 이듬해인 1998년 시즌에도 여전히 팬들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가 나오면 어느 경기건 간에 ‘승리로 가는 보증수표’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경험만 더 쌓으면 언제든지 10승, 15승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후 해태는 KIA 시절을 포함하여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무대에 초대받지 못했다. 1997시즌을 끝으로 일본으로 떠난 ‘팀의 주축’ 이종범의 공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지난 시즌 우승팀이 5위로 시즌을 마치는 등 어려운 팀 사정 속에서도 김상진은 6승 11패, 방어율 3.87로 ‘3년차 투수’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이것이 김상진에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김상진. 그는 1990년대 중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새 희망' 이었다 ⓒ KIA 타이거즈 구단 제공
시즌 직후, 목 주위를 포함하여 온몸에 이상을 느낀 김상진은 마침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그에게 내려진 병명은 위암 말기. 길어야 3개월이라는 최종선고를 받았을 때에는 김상진 본인보다 팀과 주위 팬들이 받았던 충격이 더욱 컸다.
하지만, 김상진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일어나 야구를 하고싶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을 위해 다시 그라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고 싶다’는 등 시종일관 그라운드로 복귀하고자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에 임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를 향하여 모든 야구팬들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병실을 찾아 인터뷰하러 오는 이들이나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던 김상진은 꿈에 그리던 그라운드를 가슴에 품고 1999년 6월 10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당시 나이 겨우 22세.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하는 그에게는 너무나 이르고도 아까운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도 시즌 7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해 어깨수술로 재기를 꿈꾸던 이대진이 김상진의 등번호 11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기도 했다. 당시 이대진은 ‘상진이가 못다 이룬 꿈을 내가 대신 해주고 싶다’며 자신이 달았던 45번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후 이대진은 2000년 시즌에 8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하는 듯싶었지만, 두 번 다시 전성기 때와 같은 모습을 재현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대진은 김상진이 생각났다고 한다.
3년간 24승 26패 2세이브, 방어율 3.90의 성적을 남겼던 故 김상진.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매년 6월 10일만 되면 그가 생각나는 것은 1997년 한국시리즈 당시 마운드에서의 배짱 넘치는 모습이 여전히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면, 현재까지 KIA 타이거즈 마운드를 책임지는 주축 투수로 성장했을 것이다. 김상진. 그는 그런 선수였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