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두 경우를 상정해 보자.
상황 1) 투아웃, 주자 없이 투스트라익 노볼 상황에서 유인구로 "버리려는" 공을 타자가 정확히 받아쳐서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하여 1득점을 기록하였다.
상황 2) 노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1번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한 다음에 도루로써 2루를 밟았다. 2번 타자가 번트를 댄 즉시, 2루 주자는 3루로 진루하였고, 3번 타자의 희생 플라이로 1점을 취득한 이후 공격을 마쳤다.
첫 번째는 투수가 유리한 볼카운트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버리려고" 하는 공을 타자가 제대로 맞받아쳐서 홈런을 기록한 경우다. 보통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투수는 아무래도 맥이 빠지게 된다.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되는 상황에서 일부러 ‘볼’을 던지려고 의도한 공을 타자가 맞받아 쳤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하나면 이닝을 마무리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더 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홈런을 허용한 A급 투수는 이후 정신을 차리며, 후속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는 집중력이 생기게 된다. ‘내가 실투했구나’ 라는 생각을 가슴 속에 품고, 더욱 더 피칭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박찬호도 홈런을 허용한 이후에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한 전례가 얼마든지 있다. 다만, 루키나 경험이 적은 어린 선수들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첫 번째 상황에 따른 투수의 데미지는 생각 의외로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경우가 투수에게 있어서 더 큰 데미지를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발 빠른 톱타자가 누상에 나가있을 경우,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 안타 하나 없이 득점을 주었을 때에 입은 데미지가 안타를 허용했을 때의 그것보다는 크다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다. 안타를 허용하여 점수를 내어 주는 것과 안타 하나 없이 1점을 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안타를 허용하여 점수를 내어 주는 경우에는 ‘자신이 실투를 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지만, 안타 하나 없이 내어주는 점수는 자신이 못 던져서 점수를 허용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즉, 상대팀의 철저한 팀플레이로 점수를 내어 준 경우이므로), 스스로 위로할 수 없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투수 자신을 압박하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경우가 투수에게 있어서 큰 데미지를 안게 된다.
이와 같이 두 번째 경우처럼 짧은 시간에 안타 하나 없이 점수를 내는 능력이 있는 팀에 꼭 필요한 것은 훌륭한 테이블 세터의 존재일 것이다. 발 빠른 선수의 누상 출루와 이를 뒷받침하는 후속타자의 작전 수행 능력은 두 번째 상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요충분조건이다.
톱타자에 대한 짧은 견해
우선, 1번 타자부터 살펴보자. 톱타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요건을 살펴보자면 다음의 일곱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해 도루 30개 이상 소화 가능한 빠른 발
2. 타석에서의 끈질김
3. 3할대 중반 이상의 출루율
4. 어떻게든 누상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의지
5. 몸에맞는 볼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기
6. 중심타선보다 낮은 장타력
7. 2할 7푼 이상의 타율
이 중 1, 3, 7번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세 가지가 전제된다면, 나머지는 ‘의지’의 문제이거나 이에 따르는 ‘부수적인 효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톱타자는 공격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1루로 진출해야 하는 의무감을 갖게 된다.
내야안타, 외야안타, 번트안타, 볼 넷, 몸에 맞는 볼, 상대편 에러 등등 이 모든 경우의 수 중에서 딱 한 가지라고 성공시켜 1루로 가장 많이 진루할 수 있다면 정말로 ‘괜찮은’ 톱타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상에 출루만 하면 끝인가? 그건 또 아니다. 1루로 진출한 뒤에는 상대편 투수를 괴롭힐 수 있는 ‘심리싸움’에서 밀리지 말아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견제구를 많이 던지게 하고, 적절한 리드로 투수가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사실상 중심타선에서 장타가 나올 확률은 누상에 톱타자가 나가 있을 경우에 더 크게 나타난다. 투수가 누상에 나가 있는 발 빠른 주자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쓸 경우, 정작 중요한 중심타자와의 승부에 집중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6번째 조건이다. 중심타선보다 낮은 장타율인데, 물론 이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발 빠르고 장타력 좋은 선수가 톱타자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다. LG 트윈스의 박용택도 장타력 있는 선수지만, 1번을 치고 있다. 그러나 톱타자는 어떻게든 누상으로 출루하여 공격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많은 홈런수로 타점을 올리는 역할이 중요한 자리가 아니다. 만약에 1번 타자가 선두타자로 나와서 바로 홈런을 기록하면, 다음 2번 타자가 1번 타자의 역할까지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 가중된다. 그래서 톱타자의 홈런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중심 타선보다는 대체적으로 낮은 장타율을 보여야 괜찮은 톱타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장타가 많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스윙 숫자가 많아져서 나쁜 볼에도 쉽게 스윙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성립한다. 나쁜 볼에 자주 손이 간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그만큼 출루율이 감소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타석에서 끈질긴 모습으로 누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톱타자로서는 상당히 치명적인 부분이다.
2번 타자에 대한 짧은 견해
그렇다면, 이번에는 테이블 세터의 두 번째인 2번 타자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좋은 1번 타자가 나오기도 힘들지만, 이를 뒷받침해 주는 2번 타자가 나오기도 역시 힘든 법. 톱타자는 톱타자대로, 2번 타자는 2번 타자대로의 역할이 있기에 테이블 세터가 빛이 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2번 타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거의 1번 타자와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톱타자와는 약간 다른 2번 타자로서의 능력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1. 작전 수행 능력
2. 벤치에 별다른 작전이 없을 경우, 다음 플레이를 염두에 둔 빠른 판단력
3. 100%에 가까운 번트 성공률
4. 2할 7푼 이상의 타율
5. 3할대 중반 이상의 출루율
6. 도루 20개 정도는 문제 없는 준수한 다리
7. 밀어치기에 능한 선수
1번 타자가 출루에 성공했을 경우, 2번 타자는 어떻게든 앞선 주자를 진루시켜 3번 타자에게 찬스를 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벤치에서 어떤 작전이 나와도 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보내기 번트건, 히트 앤드 런이건 간에 벤치의 작전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이를 수행, 누상에 있는 주자를 진루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무사 혹은 1사에서 누상의 주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진루시키느냐? 번트만큼 좋은 진루타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100%에 가까운 번트 성공률 또한 아울러 필요하다.
하지만 누상에 톱타자가 나가 있을 때에도 벤치에서 별다른 작전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2번 타자 스스로 배팅을 할 수 있는 날카로운 판단력도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서 강공이냐 희생 번트냐를 정해야 한다. 한, 두점차 박빙의 승부를 연출하고 있을 때에는 희생번트를, 넉넉한 점수 차이가 나고 있을 때에는 강공을 선택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2번 타자는 1번 타자가 범타로 물러났을 때에 톱타자의 역할을 아울러 할 수 있는 재주도 필요하다. 그래서 톱타자 부럽지 않은 빠른 발과 높은 출루율이 2번 타자에게도 요구된다.
두산 베어스의 장원진 선수의 경우 전성기 시절, 빠른 발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주루센스와 높은 출루율로 2번 타자의 역할에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을 무조건 파울처리하여 뒷 타자들이 상대투수의 구질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훌륭한 2번 타자였다고 할 수 있다. 타석에서의 끈질김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톱타자와 2번 타자와의 연관성
2004 시즌, 플로리다 말린스는 후안 피에르의 영입 이후, 루이스 카스티요를 2번으로 돌렸다. LA 에인절스는 비슷한 시기에 데이비드 엑스타인이 1번 타자로 급부상하자 데런 얼스테드를 2번으로 돌렸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는 2001 시즌을 전후하여 톱타자 퀼비오 베라스가 부상을 입은 이후, 싱글 A에 있던 라파엘 퍼칼을 불러들였고 그가 톱타자로서 신인왕에까지 오르자 이듬해에는 베라스를 2번으로 돌렸다. 국내의 경우 LG 트윈스의 이병규가 톱타자로 나서자 지금은 은퇴했던 유지현 코치가 2번을 치기도 했다.
자, 위의 사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좋은 톱타자는 훌륭한 2번 타자도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역도 성립하느냐?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다. 카스티요와 피에르의 자리를 바꾼다 해도 둘 다 훌륭한 톱타자감이기에 별 차이는 없겠지만(즉, 훌륭한 2번 타자가 훌륭한 톱타자가 될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하겠지만), 만약에 이치로와 데릭 지터가 한 팀에서 뛰게 된다고 가정할 경우 지터를 1번으로 쓰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이치로를 1번에, 지터를 2번에 배치할 것이다. 훌륭한 2번 타자가 좋은 1번 타자가 될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제조건이 따르는 샘이다.
좋은 1번 타자였던 선수가 2번 타자로서의 역할도 소화할 수 있는 반면, 2번 타자 전문인 선수가 좋은 톱타자가 될 수 있는 경우가 반드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조금 미묘한 차이겠지만, 톱타자로서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는 대체로 2번 타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도 아울러 갖춘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즉, 2번 타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톱타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의 ‘부분집합’이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톱타자였던 선수가 그보다 젊고 더욱 더 발 빠른 선수가 등장할 경우, 지체 없이 그에게 1번을 양보한다는 점이다. 즉, 2번 타자는 노련한 1번타자가 맡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훌륭한 테이블 세터는 승리를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어느 팀의 테이블 세터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진=위클리 이닝 사진팀(팀 화이트, 부산갈마구스), inning.co.kr>
[유진=http://mlbspecial.net]
※ 본 고는 위클리 이닝(http://www.inning.co.kr)에 기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