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 프로야구가 양대리그(아메리칸 리그, 네셔널 리그)의 3개 지구(서부, 중부, 동부지구)로 편성된 것은 1994년도 부터였다. 콜로라도 로키스, 플로리다 말린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템파베이 레이스 등이 90년대 이후 생겨난 신생팀이었으며, 이들 신생팀 창단에 맞추어 미 프로야구도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각 리그별 중부지구의 창시였다. 이 과정에서 밀워키 브루어스가 아메리칸 리그에서 네셔널 리그로 이동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큰 일이 메이저리그에 발생했지만,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팀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던 뉴욕 양키스는 이 시기에 '암흑기'로 들어서면서 하위권을 전전하였다. 지금의 모습과는 180도 달랐다고 보면 된다. 1980년 리그우승을 끝으로 다시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1995년에 이르기까지 15년간, 그들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의 들러리로 전락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지금의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가? 대계 1992년을 고비로 지금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선수들이 나타난 것에 의의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 실질적인 양키스 독주체제가 정립된 것도 이때부터였는데, 이는 때맞추어 나타난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 외에도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의 대거 활약 및 구단주와 감독의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렇다면 1990년대 양키스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양키스의 부흥을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은 누구였을까?
Part 2. 두 명의 감독
구단주에 조지 스타인브레너(George Steinbrenner)가 있었다면, 감독으로서 양키스를 이끈 인물은 단연 벅 쇼월터(Buck Showalter)와 조 토레(Joe Torre)다.
먼저 양키스에 입성한 사람은 벅 쇼월터로 1992년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에는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일시적으로 경영 일선에서 손을 놓은 상태였고, 따라서 전처럼 막대한 투자도 이루어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양키스 감독을 맡은 쇼월터는 기존 전력을 추스리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전까지 쇼월터는 빅리그 구단의 감독을 단 한 번도 맡은 적도 없었고, 선수 시절 빅리그 경험도 전혀 없었다. 그런 애송이 감독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는 그가 부임한 첫 해에 거둔 성적(76승 86패)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분명 직전 년도인 1991년 성적보다는 약간 나았지만(71승 91패), 여전히 하위권을 전전하는 모습을 보여 준 첫 해였다.
그렇지만, 1993년도를 기점으로 서서히 쇼월터의 진가가 나타난다. 부임 2년 만에 팀의 5할 승률을 이끈 것은 물론, 토론토에 이어 지구 2위로 시즌을 마감하기에 이르렀기 때문. 와일드카드 제도가 없어서 PO 진출에 실패했지만, 풀타임 2년 차에 맞이한 이 애송이 감독에 대해 더 이상 비아냥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맞이한 1994년에 양키스는 기어이 일을 냈다. 양대 리그, 3개 지구로 재편된 첫 시즌에서 지구 2위 볼티모어를 여유 있게 제치고 오랜만에 지구우승을 차지한 것. 하지만 이 해에는 선수노조 파업으로 114 경기 만에 시즌이 종료된다. 특히, 94년도에 거둔 70승은 아메리칸리그의 그 어떤 팀도 거두지 못했던 승수였고, ML 전체로 보면 몬트리얼(74승)에 이은 두 번째 승리숫자였기에 양키스로서는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이 해에 노조파업이 일어나지 않아 정상적으로 한 시즌을 보냈다면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쇼월터의 월드시리즈 무 진출’ 악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쇼월터의 포스트 시즌 진출의 꿈은 그 이듬해에 이룰 수 있었다. 와일드카드 제도가 도입된 첫해(1995년), 양키스는 보스턴에 이어 지구 2위를 차지하며 디비전 시리즈 진출 막차를 타게 된다. 1980년 리그우승 이후 실로 15년 만에 맞이한 포스트시즌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가을 잔치 물맛을 봤는지 당시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던 시애틀에 밀려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쇼월터가 양키스 감독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가을잔치에 진출했던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93년에 다시 구단주 자격을 회복한 스타인브레너와 반목이 심했던 '원칙주의자' 쇼월터는 노골적으로 구단주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는데,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기어이 양키스를 떠나 애리조나로 거처를 옮겼다. 허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떠난 이후 양키스는 바로 그 이듬해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내며, 약 20년만에 제국의 완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후 쇼월터 감독은 애리조나마저 일으키며 하위권 구단을 부활시키는 '야구 조련사'로 명성을 떨쳤지만 끝내 애리조나에서도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난 이후 밥 브랜리 감독에 의해 애리조나는 창단 최소년도만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내는 기이현상(?)을 일으켰다.
이후 쇼월터는 텍사스 감독으로 부임하며 만년 꼴찌인 텍사스를 대대적으로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허나 그 당시에도 쇼월터는 숙원인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쇼월터 감독이 구단주와의 불화로 인하여 미련없이 구단을 떠나기는 했지만, 이후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애리조나 창단감독으로 부임한 쇼월터 감독에 대해 축전을 보내며, 지난날 양키스를 일으켜 준 데에 따른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조 토레의 등장
어쨌든 쇼월터 이후 양키스는 애써 일으켜 온 구단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다. 구단주와의 반목으로 쇼월터가 팀을 떠난 상황에서 스타인브레너가 선택한 카드는 조 토레 감독.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면서 감독으로써도 수년간 많은 노하우를 쌓아 온 그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토레를 감독으로 앉히긴 했으나, 그에게 정말 ‘포스트 쇼월터’를 기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토레는 이전까지 14년간 뉴욕 메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을 역임하며 메이저리그 감독 내에서는 잔뼈가 굵은 감독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감독 재임 중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한 것은 겨우 5번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가을 잔치 경험은 전무했으며, 그나마 애틀란타 감독을 역임했던 1982년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 출전이 유일했다(그나마도 0승 3패로 스윕). 그런 그에게서 양키제국의 부활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토레감독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혈질적인 쇼월터 감독과는 달리 토레감독은 루 게릭과 같은 차분함으로 구단주와의 반목을 최소화했으며, 이는 양키스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에 단숨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 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물론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이전 쇼월터 감독이 쌓아 둔 공적이 이듬해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했지만, 기존 전력을 추슬러 애써 쌓아 온 지구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또한 철저한 개인주의에 빠진 선수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 있던 것도 토레감독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96년 우승 이후 98, 99, 2000년도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스타 플레이어의 산실인 양키스를 유지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스타인브레너의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2000년 이후 월드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네셔널리그에 무너지며 우승을 놓쳤지만, 스타인브레너는 토레를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감독 연장계약을 부추기며 토레의 기를 살려 주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2007 시즌이 끝난 이후 양키스는 그에게 ‘왕년의 영웅’ 대우를 해 주지 못했다. 이에 양키스와의 계약 만료 직후 토레는 곧바로 LA 다저스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렇듯 1990년대 ‘양키스의 영광’을 이끈 두 감독은 계약 기간 동안 양키스를 일으켰고, 공을 세우자마자 홀연히 팀을 떠난, ‘양키스 왕년의 영웅’이었다.
- 3편에서 계속 -
[유진=http://mlbspecial.net]
※ 본 고는 위클리 이닝(http://www.inning.co.kr)에 기고하였습니다.
유진의 꽃 보다 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