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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유종겸 코치, "생각하는 야구, 최선을 다 하는 야구 해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14.

프로야구가 탄생했던 1982년도부터 야구를 지켜본 ‘올드 팬’들은 원년 멤버들에 대한 향수가 적지 않을 것이다. 프로구단 감독 혹은 코치로서 그라운드에 남아 있는 원년 멤버들의 경우 미디어를 통하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원년 멤버들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 특히, 서울이라는 큰 시장을 갖고 있었던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의 어지간한 팬들은 ‘좌완 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던 유종겸(53)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유 코치는 서른 넷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를 역임했던 유종겸은 프로야구판을 떠나 대학야구에 뛰어들었다. 원광대 투수코치로 첫 아마야구 무대에 뛰어들었던 유종겸은 이후 배재고등학교 야구부로 적을 옮기며 새로운 코치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프로야구 개막전 승리투수’로 더 유명했던 유종겸. 과연 그는 프로 원년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야구 인생과 학생 야구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았다.


▷ 프로 원년 이야기, 그리고 백인천 감독

Q : 만나뵙게 되어 정말 반갑다. 우선 아직까지 ‘원년멤버 유종겸’을 기억하고 있는 팬 여러분들게 한 마디 해 달라.

유종겸 코치(이하 ‘유’로 표기) : (웃음) 운동하고 아직까지 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내 이름이 ‘마구마구’라는 게임에도 나오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제자들이 그 게임을 곧 잘 한다. 원광대 투수코치 시절에는 제자들이 “코치님 카드 트레이드 시킬 거다. 너무 못 한다.”라고 이야기 해 온 적이 있었다. 이게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게임 이야기더라(웃음).

어쨌든 프로야구 초창기 이후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올림픽 금메달에서부터 시작해서 WBC까지 좋은 성적을 냈는데, 사실 WBC가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당대 프로 선수들이 모두 출동한 대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2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프로야구에 몸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영광스럽고 자부심이 느껴진다.

Q : 역시 프로야구 원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백인천 선수 겸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유 : 백인천 감독님은 늘 “야구 열심히 하라.”라고 주문하셨다.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는 이상, 야구는 계속된다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정신적인 측면을 많이 강조하셨다. 사실 백 감독님의 근성은 선수단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였다. 일본에서도 갖은 차별 끝에 타율 1위에 오르는 등 성공한 선수가 되지 않았는가? 그만큼 정신력 하나만큼은 대단하셨다.

실제로 당시 선수단이 7시 산책, 9시 운동, 점심식사, 오후 6시까지 다시 운동, 야간 연습 등을 모두 소화하면 오후 9시, 10시였는데, 이를 끝까지 무리없이 소화시켰던 선수는 백인천 감독님 단 한 분 뿐이셨다. 정말로 ‘선수보다 더한 감독’ 이셨다. 남들보다 더 하셨다. 그래서 감독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영향을 많이 받았다.

Q : 개막전에 ‘사이드 암’ 이길환 투수(작고)가 선발로 나섰지만,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 : 그래서 내가 개막전 승리 투수로 이름이 올려져 있다. 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록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것 외에도 프로야구 첫 피홈런 기록도 내가 갖고 있다(상대 타자 : 이만수 SK 와이번스 수석코치. 당시 삼성 라이온스). 이것은 어찌 보면 스스로에게 ‘섭섭한’ 기록이 될 수 있지만, 이것마저 역사가 된다면 전혀 섭섭하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개막전 이후 결승 만루 홈런을 기록한 이종도 형과 나란히 사진 촬영을 했다. 그런데 참… 나중에 보니 이게 또 북한군처럼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웃음). 그런데 언젠가 이광환 감독님께서 ‘제주도 야구박물관에 무언가 전시하려고 하는데, 원년멤버로서 적당한 것 없냐?’고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당시 개막전 이후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기증했다. 그 사진을 보면 웃음도 나오지만, 참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다. 승리 투수와 승리 타점을 기록한 두 선수가 나란히 사진을 찍은 것 아니겠는가.

Q : 개막전 승리 이후 1980년대 MBC 청룡을 대표하는 투수로 우뚝 섰다.

유 : 그 당시에는 선발, 중간, 마무리에 대한 개념이 정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11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세웠던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고교시절에 내가 노히트노런을 두 번 기록(황금사자기 서울예선, 서울시 추계연맹전)했는데, 요새는 잘 하는 친구들이 무리하려고 하지 않아서 완투 숫자도 적게 나오는 것 같다. 혹시 우리나라 역대 투수들 가운데 완투를 가장 많이 한 투수가 누군지 아는가? (윤학길 현 히어로즈 2군 감독 아니냐고 되묻자) 맞다. (윤)학길이가 정말 많이 던졌다(주 : 100경기 완투로 현재 단독 1위. 2위는 최동원으로 80경기).

그랬던 시기에 1992년, 내가 투수코치 시절에 이광환 감독님을 모셨는데 감독님께서 흑판에 별(★)을 그리시더니 각 꼭지점마다 선발 투수들 이름을 쓰시고, 그 중간에는 릴리프 투수들과 마무리 투수 이름을 쓰시더라. 이른바 ‘투수 분업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당시에는 ‘스타 시스템’이라 불렀다. 국내에서는 이광환 감독님께서 최초로 시도하셨던 시스템이었다.

Q : 당시 김인식(현 충훈고 감독) 선수는 ‘배트공’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유 코치님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유 : ‘고슴도치’라는 별명이 있었다(웃음). 백인천 감독님께서 지어주셨다. 그런데 이렇게 선수마다 별명이 있었던 것고 서울이라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MBC 청룡 선수들만이 누렸던 ‘홈 어드밴티지’이기도 했다.

▷ 은퇴,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제 2의 인생’

Q : 그런데 1990년, 34세에 은퇴를 했다.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유 : 1990년 우승 후에 LG에서 “코치 한 번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 왔다. 그래서 그 제의를 받아들여 일선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프로선수들은 ‘은퇴’도 잘 해야 하는 것 같다. 물러날 때를 알고 잘 물러나는 것이 또 다른 프로정신이 아니겠는가. 내가 다쳐서 은퇴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물러남’은 확실했던 것 같다.

어쨌든 코치직을 수락한 이후에는 1991년 2군을 거쳐 이광환 감독님께서 부임한 1992년부터는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이것이 1998년까지 갔다. 이후 이광환 감독님의 퇴임과 함께 나도 같이 물러났고, 1999년부터는 1년간 야인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한야구협회에서 연락이 오더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 겸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전력분석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당시 신문에도 났는데, 그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래서 당시 선동열/한대화와 함께 시드니 올림픽 전력분석 요원으로 호주도 다녀온 경험이 있다. 동메달이라는 값진 성과를 얻었던,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서 2년간 몸담았고, 강병철 감독 부임 이후 SK 와이번스에서 1년간 머물렀다.

계약 기간 만료 후에는 원년 멤버이자 동료였던 유승안(53)이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같이 하자”고 연락이 오더라. 그래서 한화에서 2년간 몸담은 이후 다시 야인 생활을 했다. 이후 원광대 투수코치를 역임하면서 지방에 머물렀는데, 2007년도에 신언호 감독이 배재고로 부임하면서 “지방에 그만큼 있었으면 됐다. 이제 나 좀 도와 달라.”라고 하여 배재고로 오게 됐다.

Q : 기록을 보면 현역 시절, 정확히 5할 승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유 : 내가 현역 시절 통틀어 57승 57패 13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런데 1980년도 당시에는 두산과 삼성이 정말로 전력이 탄탄했는데, 내 기록의 절반이 두 팀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웃음). 그렇게 맞춰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 그렇게 기록이 세워졌다.

Q : 프로에만 있다가 아마야구로 적을 옮기게 됐다.

유 : (아마야구로 적을 옮기면서부터) “아이고!”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웃음). 점점 어려워진다. 프로는 ‘형성’이 된 선수들이고, 대학 선수들은 ‘반쯤 형성이 된’데 비해 고교야구 선수들은 ‘자리지 않은 새싹’들이다. 그래서 인생 공부도 하게 됐다. 내가 대학 야구도 경험했지만, 고교야구에서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볼넷을 주지 않고, 에러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다.

그런데 처음 고교야구를 맡았을 때에는 당황을 많이 했다. 그만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현역 시절에 단 한 번도 다쳐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2군 코치 시절에 부상 선수들에 대한 눈높이를 맞추기 힘들었고, 프로에서는 당연히 ‘쉬운 플레이’로 여겨지는 것도 고교야구에서는 ‘나이스 플레이’로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됐고, 지금도 인생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Q : 혹시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유 : 나는 딱 두 가지만 강조한다. (한 선수를 부르더니) 너, 내가 평소에 강조하는 것이 뭐냐? 매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 이야기 해 봐. (“생각하는 야구, 최선을 다 하는 야구입니다.”라고 답하자) 그래, 이제는 잊지 않고 잘 외우고 다니는구나. 바로 이거다. 다음 플레이를 ‘생각하며’ 야구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운동인 만큼,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 두 가지만 하면 무난하다. 내가 이를 강조하는 것은 고교무대에서 이것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강조하게 된다.

1. 성명 : 유종겸(배재고등학교 투수코치)
2. 생년월일 : 1956. 9. 14
3. 체격조건 : 176cm, 75kg
4. 포지션 : 투수(좌투좌타)
5. 경력 : 선린상고→중앙대학교→MBC 청룡→LG 트윈스(1990년 은퇴)→LG 트윈스 투수코치→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전력분석원→현대 유니콘스 투수코치→SK 와이번스 투수코치→한화 이글스 투수코치→원광대 투수코치→배재고 투수코치

<사진=유종겸 코치/직접 촬영 (C) 야구타임스 김현희>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