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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히어로즈의 또 다른 히어로, 정민태 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18.

한국 프로야구에서 1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는 단 20명에 불과하다.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 숫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이저리그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100승 거두기가 더 어렵다. 프로 원년에는 팀당 80경기를 치르는 데에 그친데다 1989년에 이르러서야 팀당 120경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팀당 162경기를 치르는 강행군 속에 20승 투수도 여럿 배출하는 미국 프로야구와는 분명 기반이 다르다.

하지만,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개인 통산 100승 이상을 거둔 선수는 단 567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100승을 거둔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이 어렵다. 10년 동안 10승 이상 기록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꾸준함’과 ‘팀 타선의 도움’이라는 양자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124승(공동 8위)을 거둔 정민태 현 히어로즈 코치의 기록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양대학교 시절부터 국가대표를 경험했던 ‘대형 투수’였으며, 당시 태평양 돌핀스가 그를 지명했을 때 ‘만세’를 부를 정도로 신인 시절부터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였다. 또한, 선동렬, 이종범, 정민철 등과 함께 일본 진출의 꿈을 이루었던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 에이스’였다. 비록 일본 진출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현대 유니콘스의 맏형’이기도 했다.

그랬던 정민태는 작년 KIA 타이거즈에서 은퇴를 선언한 이후 올 시즌부터 히어로즈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주위에서는 ‘초보 코치’ 정민태에게 1군을 맡기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또 다른 ‘투수 조련사’ 김시진 감독과 함께 히어로즈 투수진을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화려하면서도 외로웠던, 그리고 한 편으로는 힘들지만 보람 있었던’ 현역 시절에 대한 추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정민태의 야구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목동구장을 찾았다.

▲ 김시진 감독과 나란히 앉아 있는 히어로즈 정민태 코치. 둘의 인연은 현대 유니콘스 시절부터 각별했다.

▷ 태평양,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

Q : 매번 야구장에서 만나지만, 이렇게 서로 마주보면서 만나니 느낌이 새로운 것 같다. 우선 아직까지 ‘선수 정민태’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팬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그 동안 선수생활 하면서 정말 팬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서 야구를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 생활은 그만 뒀지만, 그래도 꾸준히 지금도 사랑해 주시고 지켜봐 주시니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코치 생활 하면서, 더 좋은 선수를 발굴해 내어 팬 여러분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Q : 1992년 프로 지명 당시 태평양 돌핀스에서 대형 신인 지명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초반 2년간은 썩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당시 문제가 무엇이었나?

1992년 입단은 했지만, 당시 몸이 덜 된 상태였다. 동계 훈련도 제대로 못 한 상황에서 조금 성급하게 경기에 등판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첫 게임에서 4회 던지다가 팔꿈치에 ‘뜨끔’한 기운이 올라서 ‘아프다’라고 말하고 내려왔는데, 그때서부터 팔이 계속 퉁퉁 부었다. 팔이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아 그 해 8월에 미국으로 가서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일명 ‘토미 존 수술’)을 앤드류 박사(토미 존 수술을 처음 고안해 낸 프랭크 조브 박사의 제자)에게 받았다.

그런데 내가 국내 선수 중 그 수술을 받은 첫 번째 선수였기 때문에, 재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시기였다. 그래서 당시 언론 매체에서는 부상당한 나를 향하여 ‘정민태라는 유망주에 대해 잘 못 알았다’, ‘재기 가능성이 없다’라고 기사화하기도 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나 역시 ‘반드시 재기해서 이런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2년간의 노력 끝에 재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Q : 재기했던 시점이 공교롭게도 소속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1994년이었다.

사실 태평양 시절에는 타력보다는 투수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이는 선수층이 얇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시리즈까지 간다는 생각을 사실 못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따라줬다. 당시 포스트 시즌에 등판해서 잘 던졌는데(주 : 정 코치는 당시 1994년 플레이오프/한국시리즈에서 1승, 방어율 1.31을 기록했다), 아무래도 큰 경기 경험이 많은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그 경기 이후 태평양에서 현대로 바뀌면서 선수들도 많이 보강되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Q : 정말 ‘현대 유니콘스’와 정민태라는 인물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현대 시절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는데(1998, 2000, 2003, 2004년) 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은 몇 년도였나?

1998년 첫 우승할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2003년도에 SK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한 것(당시 혼자 3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됨), 2004년도에 삼성과 9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한 것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 KBS '천하무적 야구단' 녹화에서 텔런트 오지호씨를 지도하고 있는 정민태 코치

▷ 일본진출, 그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Q : 1998년도와 2000년도 한국시리즈 우승이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입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일본에 진출하려고 했던 것은 당시 힘든 형편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나의 사정을 구단에 솔직하게 다 이야기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일본에 가지 못하면, 목돈을 만지지 못하게 되면 힘든 상황이 된다. 이제까지 내가 팀을 위해서 적지 않은 공헌을 했으니, 일본에 보내줄 수 없겠느냐?”라고 솔직히 이야기 했더니, 故 정몽헌 구단주께서 “보내주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Q : 돌아가신 정몽헌 회장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故 정몽헌 회장님은 선수단을 이끌고 금강산도 다녀오는 등 적지 않은 야구사랑을 과시하셨다.

정몽헌 회장님도 그러했지만, 원래는 정몽준 회장님께서 야구쪽에 관심을 많이 가져 주셨다. 사실 구단주님은 정몽헌 회장님이셨지만, 정몽준 회장님 역시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면서 선수들에게 운동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많이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정몽준 회장님께도 많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정몽헌 구단주님께서 야구단에 상당한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야구를 하면서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는데, 정몽헌 회장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정말 침통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야구단의 운명도 여기서 끝이 되지 않느냐’는 걱정도 많이 했었다. 그것이 어찌 보면 현실이 됐고… 그랬기에 현대라는 팀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열어 준 팀이라고 생각한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팀들이 계속 나와 주어야 프로야구에 발전이 있을 텐데, 아직 부족하다는 점이다. 각 구단마다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Q : 자, 이제 일본 진출 관련 이야기를 해 보겠다. 물론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지만, 그러한 이야기들 중 당시 언론에 잘못 보도된 내용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주었으면 한다.

지금은 그만두었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갔을 당시에는 한국 선수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다못해 내가 마운드에 올라와서 공을 던지더라도 내가 던지기 싫은 구종이 있을 때에는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못 하게 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린애 취급하듯이 ‘포수가 싸인 내는 대로 던져라’라고 주문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구질을 포수가 잘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사인을 내다보니 오로지 ‘직구/슬라이더’ 두 개밖에 내지 못 했다. 그런 상황이 많았다. 또 당시 투수코치가 가토리 코치였는데, 나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코앞에까지 가서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 정도로 좋지 않은 쪽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스프링 캠프 때 고등학생들이 견학 와서 배팅 체험을 했는데, 나에게 배팅 볼을 던지게 했다.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충격이었다.

사실 나는 일본 프로야구에 적응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다 따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친구가 한국에서 온 최고의 투수야? 그래 어디 한 번 호되게 당해보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한 번은 내가 중간계투로 일주일에 다섯 번 등판하여 네 번 성공하고 한 번 실패했는데, 그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경기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운드에서 (투수코치가) ‘2군 가라.’라고 통보하기까지 했다. 그런 부분들이 너무 자존심 상하게 했고, 더 이상 일본에서 야구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일본 진출할 때 3년 계약하고 갔는데, 구단에 “2년만 하고 돌아가겠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구단에서 위약금을 물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 구단 측에서 나에게 위약금을 물게 하면, 나는 한국에 있는 언론사들에 모든 사실을 밝히겠다.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요미우리가 어떤 구단인지 밝히겠다.”라고 하자 구단 측에서는 “그럼 위약금을 물지 마라. 그 대신 조건이 일본에 있는 어느 구단도 가지 않는다는 동의서를 써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 주었다.

Q : 항간에는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다투었다는 이야기까지 돌기도 했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것은 아니다. 선수단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다만, 코칭스태프와의 문제가 컸다.

히어로즈의 또 다른 히어로, 정민태 ② 에서 계속 -

<사진=직접 촬영 (C) 야구타임스 김현희>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