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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 Sports

만약 당신이 이호석의 입장이었다면?

by 카이져 김홍석 2010. 2. 15.

기분 좋은 설날에 남자 쇼트트랙 1500m 경기가 있었죠. 예선부터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지켜봤었는데요. 금메달을 딴 이정수 선수를 비롯해 이호석성시백까지 모두의 기량이 다른 나라 선수들에 비해 단연 압도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정수 선수보다 이호석 선수의 금메달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준결승에서 보여준 그의 엄청난 막판 스퍼트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승전에서 국민들은 기쁨과 더불어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정수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좋았지만, 2-3위로 나란히 들어오며 은메달과 동메달까지 싹쓸이 해줄 것으로 보였던 성시백과 이호석이 서로 부딪혀서 넘어졌기 때문이죠.

 

덕분에 이정수 선수에 대한 찬사 이상으로 이호석 선수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더군요.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의 입장에선 은-동의 두 메달을 놓친 아쉬움과 더불어, 하필이면 그 결과로 은메달을 딴 주인공이 ‘공공의 적’ 아폴로 안톤 오노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 이호석 선수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그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이’ 행동 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1등을 위해 다소간의 무리를 감안하면서까지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은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앞서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파벌싸움을 비롯해 안현수나 이승훈과 관련된 그런 것들)을 일단 모두 제쳐놓고, 이번 레이스만 생각해 봅시다. 마지막 한국 선수 세 명의 위치는 매우 근접해 있었습니다. 3위라 하더라도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지요. 실제로 우리나라의 대표급 선수라면 그러한 상황에서의 역전극(역전을 했건, 아니면 당했건)을 수도 없이 겪어봤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호석도 욕심이 생겼겠지요. 잘만하면 단숨에 1위로 치고 올라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다소 무리한 추월을 시도했고,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성시백과 엉켜 함께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쇼트트랙에서의 ‘멋진 추월’과 ‘무리한 추월’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죠. 그것에 대한 판단은 매우 찰나의 순간에 벌어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한 점은 대부분의 스포츠가 마찬가지이지요. 2002년 한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김남일의 트레이드 마크인 ‘상대 선수 옷 잡아당기기’도 우리 입장에서나 멋진 플레이지, 다른 나라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반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이호석의 추월은 양날의 검이었지만, 일단 성공했다면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만한 플레이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판단 기준은 ‘결과’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이호석은 실패했고, 애꿎은 성시백까지 휘말리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스포츠맨십을 완전히 무시한 싹수가 노란 플레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당시 2위가 성시백이 아니라 오노였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더라도 이호석의 추월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마 이호석이 추월을 시도한 사람이 오노였다면, 그 추월이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을 겁니다.

 

추월에 성공해 은메달(혹은 금메달)을 땄다면 ‘오노를 물 먹인 영웅’으로 칭송했을 테고, 만약 실패했다 하더라도 네티즌들은 ‘밉상 오노의 메달을 사라지게 만든 통쾌함’에 기뻐하며 또 다른 측면(음지)에서 이호석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지금의 이 가정에 대해 ‘절대로 그럴 리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 혹시 계신가요?

 

이호석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분들 중에는 ‘2위가 다른 나라 선수도 아니고 한국 선수인데, 굳이 그런 무리한 추월을 시도해야 했나?’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스포츠맨십’을 깡그리 무시한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아니던가요?

 

올림픽은 국가 대항전의 성격이 짙지만, 각각의 종목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개인 대 개인의 싸움(단체 경기 제외)입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스포츠맨십입니다. 그런데 앞선 선수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추월을 꺼린다면, 그거야 말로 나눠먹기라는 이유로 비난 받아 마땅한 것 아닐까 싶네요.

 

이호석이 처음부터 성시백에 대한 감정이 나빠서 내 앞이 성시백이니까 같이 침몰하는 한이 있더라도 추월을 시도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그런 플레이를 펼쳤다면 욕을 먹어야겠죠. 하지만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호석은 그런 상황이었다면 앞이 누구였건 간에 더 나은 성적을 위해 추월을 시도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그것이 무리한 플레이라고 결정지어지는 것은 결과론에 의한 것뿐이지요.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실격이 된 만큼 이호석이 성시백과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1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동료 선수의 메달까지 날려버렸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이호석에 대한 여론이 마치 의도적으로 그런 플레이를 한 것처럼 마녀사냥식으로 흘러간다면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나라 대학생의 상당수는 명백한 반칙인 커닝을 한낱 학창시절의 추억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잔머리를 굴려서 새치기에 성공하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마냥 기뻐하고,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가 다른 나라 선수에게 반칙을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영리한 선수라며 치켜 세웁니다. 특히 군대에서는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동기나 후임들을 팔아 먹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 남자들이 엄청나게 많지요.

 

그런 분들이 왜 이호석의 승부욕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이호석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좀 더 나은 성적이 가능할 것 같은데도, 앞의 두 선수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동메달에 만족하시겠습니까?

 

저였다면 이호석처럼 추월을 시도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공했다면 스스로의 플레이에 뿌듯함을 느끼며 자랑스러워했을 테고, 실패했다면 성시백과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백배 사죄했을 것 같네요. 물론 한편으론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도 남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그러한 후회의 연속이 아니던가요…?

 

이호석의 플레이가 아쉬움이 남는 플레이임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용서할 수 없는 비겁한 플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저 역시 2등이나 3등보다는 1등이 되고픈 마음이 더욱 큰 아주 일반적인 군상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겠지요.

 

이호석 선수가 5000m 단체전에서 멋진 모습으로 한국 선수단에 금메달을 안겨주며, 지금의 모든 아픔을 씻어내길 기대해 봅니다. 당사자인 성시백 선수와 그의 어머니도 용서를 한 마당이니, 국민들 역시도 감정을 추스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 카이져 김홍석[사진=S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