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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Lima Time’을 외치던 고(故) 호세 리마를 추억하며...

by 카이져 김홍석 2010. 5. 24.

꼭두새벽부터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오는 군요. 메이저리그 20승 투수이자 한때 한국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용병 투수로 활약하던 호세 리마(Jose Lima)가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사인은 심장마비, 1972년생인 리마는 올해로 만 37세에 불과해 그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사인으로 보아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 문제는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한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투수의 요절이라는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니까요.

 

리마는 놀라우리만치 화려했던 한 때의 기록만큼이나 특유의 입담과 기행으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선수였죠. 그는 언제나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주위의 비웃음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기행으로 주목을 받던 선수였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꽤나 많이 비꼬거나 흉을 봤던 선수라 그런지 그의 사망 소식이 더욱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특유의 기행으로 웃음을 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1972 9 30일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리마는 만 17세이던 1989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입단합니다. 그리고 18세이던 1990년부터 마이너리그에서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되죠.

 

사실 리마는 그다지 주목 받는 유망주가 아니었습니다. 2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5점대를 넘어가는 방어율을 기록했고, 20살이 되어서도 싱글A에 머물러 있는 그저 그런 선수였죠. 메이저리그의 유망주 전문 사이트인 <베이스볼 아메리카>가 선정하는 100대 유망주에도 그 이름을 한 번 올려 보지 못했습니다. 실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제로에 한없이 가까운 그런 선수였던 것이죠.

 

1994년에 빅리그에 데뷔하고, 95년과 96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합쳐서 150이닝 가량을 던졌지만, 96년까지 통산 성적이 8 16패 방어율 6.24로 낙제 수준이었습니다. 그대로 퇴출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이었죠.

 

그러다가 96 12, 휴스턴과 디트로이트의 5:4 트레이드에 포함되어 휴스턴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첫해였던 97년에는 또 다시 불펜에서 5점대 방어율(1 6 5.28)을 기록하며 실망만을 안겼죠. 사실 이 선수가 이듬해 팀의 풀타임 선발로 활약하게 된 것은 어쩌면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휴스턴 에이스였던 데럴 카일이 FA가 되어 콜로라도로 이적하는 등 선발진에 구멍이 생기자, 래리 디커 감독은 선발 경험이 있는 리마에게 기회를 주었는데요. 그때부터 리마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기적을 이루어 냅니다.

 

4월에 등판한 6경기에서 모두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며 4 1패 방어율 2.61을 기록한 리마는 그대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 버리죠. 그리고 그 해 16 8패 방어율 3.70이라는 수준급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한 몫을 제대로 합니다. 팀이 오랫동안 기대하며 키워왔던 동갑내기 마이크 햄튼(당시 11 7 3.36)보다도 오히려 좋은 성적이었죠. 리마는 233이닝을 소화했고, 3번의 완투와 1번의 완봉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9, 리마는 햄튼(22 4 2.90)과 동반 20승을 달성하며 팀을 다시 한 번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고 사이영상 투표에서도 4위를 차지합니다. 그의 유일한 올스타 경력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35경기에 선발 등판한 리마는 무려 246이닝을 소화하며 21 10패 방어율 3.58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제프 벡웰(42홈런 126타점)과 크렉 비지오(16홈런 123득점)를 필두로한 막강 타선의 도움을 얻은 결과이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20승을 거둔 리마의 피칭은 놀라웠습니다.

 

박찬호를 오랫동안 지켜보신 팬이라면 그의 99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 전반기의 부진을 씻고 후반기의 쾌투를 이어가던 박찬호는 시즌 마지막 등판이자 14승 도전 경기에서 7이닝 1실점을 하고도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는데요. 바로 그 경기에서 박찬호의 매치업 상대가 휴스턴의 호세 리마였습니다. 당시 리마는 7.2이닝 8탈삼진 무실점의 깔끔한 피칭으로 열띤 투수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21승째를 챙겼었지요. 그 경기를 직접 보셨던 분이라면, 구위가 박찬호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 같은 선수가 이미 20승을 거뒀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다저스 타자들이 그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 점수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셨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당시 리마는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92마일(148km)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구질을 보완해줄 낙차 큰 싱킹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그리고 커브를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질의 적절한 로케이션을 통해 상대 타자들을 요리했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생각 없는 떠벌이에 지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는 생각보다 똑똑하고 노련한 피칭을 할 수 있는 투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운은 단 2년 만에 끝이 나고 맙니다. 새 밀레니엄인 2000년을 앞두고 리마는 이제부터 리마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며 호언장담했지만, 그는 주변의 환경 변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지요.

 

99년까지 휴스턴이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에스트로돔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투수친화적인 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에 새로이 문을 연 앤론필드는 쿠어스필드 다음으로 타자에게 유리했던 타자친화적인 구장이었던 것이죠. 결국 자만했던 리마는 7 16패 방어율 6.65라는 끔찍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고, 그 후로 다시는 전성기 시절의 기량이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2004년 또 다시 투수들의 구장인 다저스타디움을 홈으로 사용하는 LA 다저스 소속으로 13 5패 방어율 4.07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부활하는 듯 했으나, 이듬해 캔자스시티에서 5 16패 방어율 6.99의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며 다시 좌절하고 맙니다. 그리고 2006년 뉴욕 메츠에서 4경기만에 4패를 당한 후 빅리그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그의 마지막 선발 등판 일지에는 상대 팀 투수였던 돈트렐 윌리스에게 맞은 만루 홈런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 이후로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마이너리그와 멕시칸리그 등을 전전하다가 2008시즌 우리나라 KIA 타이거즈와 계약하여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한 물 간 투수라곤 해도, 한때 메이저리그에서 20승을 거뒀던 투수라 큰 기대를 모았지요. 하지만 특유의 엄청난 파이팅과 돌출된 행동으로 많은 인기를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14경기에서 3 6패 방어율 4.89의 아쉬운 성적을 남긴 후 결국 퇴출되고 맙니다. 조금 더 기회를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그 다혈질의 성격으로는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마이너리그 통산 68 71패 방어율 4.00

메이저리그 통산 89 102패 방어율 5.26

 

리마의 통산 성적입니다. 어디서든 패가 더 많았고, 방어율도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2년 동안이나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활약하며, 한 때 20승까지 거뒀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런 도 어느 정도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리마이기에 37세의 나이에 요절해 버린 것은 너무나 안타깝네요.

 

메이저리그 최고의 코미디언이자 떠벌이였지만, 그 행동이 결코 밉지 않았기에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던 호세 리마. 오늘 하루 만큼은 떠나는 그를 추억해보려 합니다. 벡웰-비지오 콤비가 이끌던 90년대 말의 휴스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팀이었고, 리마는 그런 휴스턴의 선발 3각 편대(다른 두 명은 쉐인 레이놀즈와 마이크 햄튼) 중 한 명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으니까요. 오늘 저녁에는 그를 기억하며 술잔을 기울여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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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 김홍석[사진=KIA 타이거즈, ML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