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건, 개인이건 무릇 스포츠의 재미를 더해주는 필수요소는 존재는 '라이벌'이다. 하늘은 양준혁을 낳고 또 이종범을 낳았으며, 최동원과 함께 선동열을 낳았다. 이승엽에게는 심정수라는 훌륭한 경쟁자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매 시대별로 비슷한 시기에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했던 타자 라이벌전이 2003년 당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놓고 경쟁했던 '이승엽 vs 심정수'라면, 최고의 투수 라이벌전으로는 1995년 이상훈(LG)과 김상진(OB)의 대결을 꼽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당시 두 선수의 소속팀이던 LG와 OB(현 두산)는 같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서울 라이벌'이었던 데다 우승의 최대 경쟁자이기도 했다. 두 팀이 프로야구계를 호령했던 95년은 양팀의 전성기가 겹쳤던 거의 유일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상훈과 김상진은 각기 소속팀을 대표하는 최고의 에이스이자, 국내 좌-우완 투수의 간판주자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다. 그 해 두 선수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는데, 이상훈은 30게임에 등판하여 228⅓이닝(12완투 3완봉) 동안 2.01의 평균자책점으로 20승 5패 탈삼진 142개의 눈부신 성적으로 그 해 다승왕을 차지했다.
당시 이상훈이 기록한 20승은 국내 투수가 선발등판으로 달성한 마지막 20승 기록으로 아직까지 역사에 남아있다. 96년 김현욱(쌍방울)은 구원등판으로만 20승을 기록했고, 99년 정민태는 20승 가운데 1구원승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훈은 이러한 월등한 성적을 차지하고도 팀 성적에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OB 김상호(홈런, 타점 2관왕)에 밀려 아쉽게 MVP를 내줘야 했다.
OB의 에이스 김상진의 성적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27게임에 등판하여 209이닝 동안 2.11의 평균자책점으로 17승 7패 159탈삼진을 기록한 김상진은 이상훈보다 1경기 더 많은 13완투를 달성했고, 그 중 무려 완봉승이 8번(단일 시즌 최다 기록)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이해 김상진 3연속 경기 완봉승(5월 11~23일)으로 역대 타이기록을 수립했으며, 5월 23일 잠실 한화전에서는 연장 12회까지 무려 17명의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진기록(연장 포함 역대 2위)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이 김상진과 더불어 이상훈이라는 또 한 명의 거물을 낳은 게 문제였다. 95시즌 두 에이스의 먹이사슬은 그야말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주유와 제갈량'의 관계와 유사했다.
그렇다면 두 에이스의 맞대결 성적은 어떠했을까. 공교롭게도 김상진은 유난히 이상훈을 상대로 약했다. 두 투수는 95시즌 3번의 선발 맞대결을 펼쳤는데, 3번 모두 이상훈이 승리투수가 되었고 김상진은 패전의 멍에를 썼다. 결과적으로 이 3번의 맞대결 결과로 이상훈은 20승 투수가 되었고, 김상진은 17승 투수에 머물렀으니 아이러니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첫 대결인 95년 5월 30일 경기에서 이상훈은 8이닝 4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되었고, 김상진은 1⅓이닝 만에 7피안타로 2실점하며 조기 강판되어 계속될 불운을 예고했다.
최고의 백미는 7월 4일 열린 두 번째 맞대결, 이날 경기에서는 두 투수는 모두 완투하며 역대 손꼽힐만한 투수전을 펼쳤지만, 결국 1점만 내준 이상훈이 2점을 내준 김상진에 판정승을 거뒀다. 최후의 대결은 두산과 LG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8월 13일에 열렸는데, 김상진이 초반부터 무너지며 6이닝 5실점에 그친 반면, 이상훈은 8이닝 2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면서 또 한번 승리를 따냈다.
두 투수는 각기 상대팀과의 대결에서 5차례씩 등판했는데 이상훈이 OB에 5전 전승, 김상진은 2승 3패에 그쳤다. 훗날 김상진은 당시에 대하여 "이상훈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유난히 LG만 만나면 경기가 꼬였다. 잘해야겠다는 의욕도 강했고, 긴장감이 지나치다 보니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두 선수는 치열한 선두 경쟁을 펼치던 시즌 막판 한번 더 대결할 기회가 있었으나, 라이벌전의 열세에 부담을 느낀 OB가 김상진의 등판 일정을 조정하며 이상훈을 피했다. 양팀의 시즌 마지막 3연전에서 첫 경기에서 등판한 김상진과 마지막 최종전에 등판한 이상훈은 나란히 승리투수가 되었지만, 양팀간 시즌 상대전적은 LG가 11무 1무 6패로 크게 앞섰다. 정확히 이상훈이 OB에 거둔 승수만큼의 우위였다.
김상진의 불운은 개인 통산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도 정작 단 하나의 타이틀도 챙기지 못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당시 김상진은 리그 다승 2위, 평균자책점 3위, 그리고 탈삼진은 3위였다. 다승은 이상훈에게 밀렸고, 평균자책점은 조계현, 탈삼진은 이대진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렸다. 당시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도 이상훈의 차지였다.
하지만 두 투수의 명암은 다시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크게 엇갈렸다. OB가 LG와의 상대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리그 후반기 엄청난 상승세를 선보이며 '뒤집기'에 성공한 것. OB는 시즌 최종일을 하루 남겨두고 0.5게임 차로 LG에 역전 우승을 확정 지으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가 마지막 날 2위로 밀려난 LG는 결국 흐트러진 분위기를 추스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 3위 롯데에게 2승 4패로 무릎을 끓었다.
이상훈은 롯데와의 1,4차전에 연이어 선발등판 했으나 잇달아 조기에 무너지며 부진했고, 5차전에서는 김용수에 이어 '깜짝'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며 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결국 팀의 패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반면, OB는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와 7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혈전을 펼친 끝에 13년만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김상진은 시리즈 최종전에서 6이닝 2실점으로 역투하며 그 해 최후의 승리투수가 되는 기쁨을 맞봤다. 이상훈과의 라이벌전에서 김상진은 개인성적이나 맞대결은 모두 뒤졌지만, 팀의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통해 '최후에 웃는 자'로 남을 수 있었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뉴스뱅크, 기록제공=Stat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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