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이져의 야구 칼럼/프로야구 이야기

‘에이스’가 실종된 한국 야구의 가을잔치

by 카이져 김홍석 2010. 10. 19.

2003년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플로리다 말린스였다. 당시 플로리다가 우승할 것이라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으나, 에이스 자쉬 베켓의 놀라운 피칭이 그 모든 예상을 뒤집었다. 베켓은 시카고 컵스와의 내셔널리그(NL)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에서 9이닝 2피안타 11탈삼진 완봉승을 거두며 탈락 위기의 팀을 구했고, 3일 후 7차전에는 구원투수로 또 다시 등판해 4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을 월드시리즈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도 9회까지 5안타 9탈삼진 완봉승을 거두며 자신의 힘으로 플로리다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2005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당시 화이트삭스는 LA 에인절스와의 아메리칸리그(AL)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경악할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야구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차전에서 패한 후 2차전부터 5차전까지 마크 벌리(1실점), 존 갈랜드(2실점), 프레디 가르시아(2실점), 호세 콘트레라스(3실점)로 이어지는 4명의 선발 투수가 4경기 연속 9이닝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승리를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투수전이 계속해서 펼쳐졌지만, 그 누구도 이 시리즈가 재미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2007년에는 보스턴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자쉬 베켓이 또 다시 가을 사나이로서의 명성을 미 전역에 떨쳤다. LA 에인절스와의 디비즌 시리즈에서부터 완봉승을 거두며 4년 전에 이어 2경기 연속 가을잔치 완봉승을 거두더니, 월드시리즈까지 총 4경기에 선발 등판해 30이닝 동안 고작 4점만 내주는 완벽한 피칭(방어율 1.20)으로 4전 전승을 따냈다. 30이닝 동안 허용한 안타와 볼넷은 합쳐서 고작 21, 반면 삼진은 무려 35개나 잡았다.

 

이듬해인 2008년에는 필라델피아의 신예 좌완 콜 하멜스가 전년도의 베켓에 못지 않은 포스를 자랑하며 소속팀을 월드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하멜스는 5경기에 등판했고, 35이닝을 소화하며 1.80의 방어율로 4승 무패를 기록했다. 작년에는 우승을 위해 뉴욕 양키스가 거액을 들여 영입한 C.C. 사바시아가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사바시아는 포스트시즌 5경기에서 모두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며 3 1패 방어율 1.98의 좋은 성적으로 팀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세웠다.

 

올해도 지금 진행중인 메이저리그의 포스트시즌에는 특급 에이스들의 환상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2008년 사이영상 수상자 출신인 텍사스 레인저스의 좌완 에이스 클리프 리는 올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승률 1위인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디비즌 시리즈 1차전에서 7이닝 1실점 10탈삼진의 뛰어난 투구로 승리를 거뒀다. 리는 AL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권이 걸려 있는 5차전에 다시 한 번 등판했고, 이번에는 9이닝 동안 1실점 11탈삼진 완투승을 거두며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리보다 더한 관심을 끈 투수들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우완 에이스 로이 할러데이현역 최고의 우완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자신의 첫 포스트시즌 등판이었던 디비즌 시리즈 1차전에서 올 시즌 내셔널리그 득점 1위였던 신시네티 타선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 쇼를 펼치며 축제의 시작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무려 54년 만에 나온 역대 2번째 포스트시즌 노히트 게임이었다. 이튿날에는 작년까지 2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한 또 한 명의 최고 우완인 샌프란시스코의 팀 린스컴이 애틀란타 타선을 상대로 14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9이닝 2피안타 완봉승을 거뒀다. 그 경기의 스코어가 1-0이었기에 더욱 빛나는 값진 승리였다.

 

이번 포스트시즌 최대의 화두는 바로 이들 두 명의 우완 에이스가 맞붙은 NL 챔피언십 1차전이었다. 이 대결을 놓고 수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며 관심을 보였고, 경기는 예상했던 대로 1점차 박빙의 승부가 펼쳐졌다. 기대만큼의 완벽한 피칭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둘은 모두 7이닝을 소화했고 3실점한 린스컴이 4실점한 할러데이를 꺾고 승리를 거뒀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필라델피아의 또 한 명의 로이오스왈트가 8이닝 3피안타 9탈삼진의 뛰어난 피칭으로 승리를 거두며 시리즈를 1 1패로 돌려놓았다. 필라델피아의 3차전 선발투수는 앞선 디비즌 시리즈에서 무사사구 9탈삼진 완봉승을 거둔 2008년의 영웅 콜 하멜스, 다시 한 번 멋진 피칭이 기대되고 있어 많은 팬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이처럼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에이스들의 멋진 피칭이 타자들의 홈런쇼와 어우러지며 멋진 가을잔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매년 최소 1명 이상의 특급 에이스가 가을 야구의 판도를 뒤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투수전과 타격전이 적절히 섞이며 응원하는 팀을 떠나 전체 야구팬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가을잔치는 어떠한가? 8~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정민태와 배영수라는 특급 에이스들이 가을 야구의 영웅으로 등극하며 팬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가을잔치에서는 에이스들의 환상적인 피칭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불펜 야구를 중요시하는 삼성과 SK가 패권을 차지하면서부터다. 작년에는 로페즈를 앞세운 KIA가 선발 중심의 야구로 정상에 섰지만, 올해 들어서는 또 다시 선발투수들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처럼 선발 투수의 활약이 미미했던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는 에이스급 피칭을 보여준 선발 투수가 드물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그리고 한국시리즈까지 13경기를 치르는 동안 총 26명의 투수가 선발 등판했지만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 이하)를 기록한 선수는 고작 3, 반면 선발이 3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된 경우는 무려 8번이나 된다.

 

26명의 선발 투수가 소화한 이닝은 총 103.1이닝으로 경기당 평균 3.97이닝, 정규시즌 평균인 5.13이닝에 비해 1이닝 이상 줄어든 수치다. 방어율도 5.84로 낙제수준(정규시즌 4.76)이며 2 5패를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다. 오히려 불펜이 선발보다 훨씬 많은 135.1이닝을 소화했고, 방어율도 4.46으로 정규시즌(4.37)과 별 차이 없이 선발보다 훨씬 좋은 피칭을 해주고 있다.

 

각 팀이 경기당 평균 4.7명의 구원투수를 투입하고 있고, 이는 정규시즌의 3.3명에 비해 5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아무리 포스트시즌임을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선발 투수들이 제 몫을 못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불펜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고, PO에서 5차전까지 치렀다는 이유로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맥을 못 추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된다. 유독 각 팀 감독들이 선발 투수를 믿지 못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며 제 몫을 해준 투수들은 준PO 2차전에서 맞대결을 펼친 사도스키(6이닝 무실점)와 김선우(7이닝 1실점), 그리고 PO 2차전에서 7이닝 무실점의 뛰어난 피칭을 선보인 히메네스가 전부다. 사도스키는 4사구가 6개나 됐고, 김선우는 그런 사도스키에게 결과적으로 판정패했음을 감안하면, 결국 경기를 지배하는 에이스급 피칭을 보여준 것은 뛰어난 피칭과 더불어 승리까지 따낸 히메네스가 유일하다. 13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명, 무려 26분의 1이란 희귀한 확률이다. 완투나 완봉도 아닌, 7이닝 무실점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들의 선발투수가 기록한 최고 성적이라는 점이 현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류현진과 더불어 올 시즌 최고의 투수라던 김광현조차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5회를 넘기지 못하고 3실점한 후 강판당했고, 카도쿠라나 장원삼, 차우찬 등 올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둔 선발들도 3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일찍 마운드를 내려가기 일쑤였다. 심지어 히메네스조차 저 1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2경기에서는 8.1이닝 동안 7실점으로 부진했다. 결국 올 시즌 한국 프로야구의 가을잔치에서 진정한 에이스’라 불릴만한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PO에 등판한 10명의 선발 중에 6명이 5이닝 이상을 버티면서 비교적 선전했지만, 투구 내용 자체는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순 없었다. PO에서는 10명의 선발 중 5이닝 이상을 버틴 선수는 고작 2, 오히려 그 두 배에 달하는 4명의 투수가 3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당했다.

 

PO의 경우 타선에서의 영웅이 꾸준히 배출되었고, 두산이 2연패 후 3연승의 리버스 스윕을 일궈낸 덕분에 재미있는 승부라는 말을 들었다. PO는 내용은 둘째 치고 매 경기와 시리즈 전체의 흐름 자체가 워낙 박빙으로 진행되었기에 높은 시청률과 더불어 명승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경기의 흐름이 모두 1점차 승부로 귀결되는 바람에 그런 평을 들었을 뿐, 내용적인 면에서 수준 높은 경기라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는 재미있는 경기라는 말조차 듣지 못하고 있다. 유일하게 5이닝을 소화한 2차전의 삼성 선발 차우찬(5.1이닝 3실점)은 패전투수가 됐고, 나머지 투수들은 투구내용 자체가 수준 이하였다. 오히려 SK 불펜의 환상적인 피칭이 시리즈를 지배하며, 그들의 압도적인 힘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매우 수준 높은 경기임은 분명하지만, 야구팬들에게 대중적으로 널리 어필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경기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김성근 감독의 경기 운영 능력은 소름이 끼치도록 탁월하지만, 팬들의 눈길을 사로 잡을 수 있는 스타 플레이어의 부재가 아쉽다. 특히 포스트시즌을 뜨겁게 달굴 만한 특급 에이스의 존재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큰 단점이다. 현재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있는 SK와 삼성은 물론, 중도 탈락한 두산과 롯데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스가 실종된 가을 야구를 진정한 축제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갖춰진 이번 포스트시즌이지만, 거기에 화룡정점을 찍을만한 특급 에이스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SK의 원투펀치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들 역시 실망만 안겨주고 말았다.

 

선발투수의 완투나 완봉은 야구에 있어 일종의 로망과도 같은 것이다. 헌데 아쉽게도 2010년 현재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가을잔치에선 그 로망을 찾을 수가 없다. 바다 건너 메이저리그를 보며 한편으로 부러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한 때는 그렇게 특출난 한두 명의 에이스가 가을 야구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다시금 특급 에이스가 가을 축제의 판도를 좌우하는 날이 올까? 류현진의 한화가 포스트시즌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면, 그건 너무 서글픈 현실이다. 에이스들의 어깨에서 프로야구의 로망이 되살아나길 기원하며, 다가올 한국시리즈 4차전에 선발 등판할 글로버와 장원삼의 환상적인 피칭을 기대해 본다.

 

// 카이져 김홍석[사진=MLB.com, 두산 베어스, SK 와이번스]

 


 


추천 한 방
(아래 손 모양)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로그인 없이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