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박찬호의 야구인생을 바꾼 선택의 순간들

by 카이져 김홍석 2011. 7. 8.

코리안특급박찬호(오릭스)는 올 시즌 일본 진출 이후 부상과 성적부진으로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릭스에서 7경기에 나서 1 5, 평균자책점 4.29에 그친 박찬호는 시즌 개막 3개월 만에 두 번이나 2군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는가 하면, 최근에는 허벅지 근육파열로 부상을 당하여 3주 진단을 받고 1군복귀가 무산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오릭스는 박찬호는 프로 경력에서 8번째 팀이다. 메이저리그에서 LA 다저스, 텍사스 레인저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등 숱한 명문팀들을 거치며 한때 리그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위용을 떨쳤고, 17년간 빅리그 아시아인 최다인 124승을 수확했던 레전드박찬호가 선수 생활 말년에 일본에서 이런 시련을 겪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숱한 스포츠 스타들이 운동 인생에서 흥망성쇠의 과정을 겪지만, 유독 박찬호만큼 그 굴곡이 크고 잦은 롤러코스터 인생도 찾기 힘들 것이다.

 

감히 아무도 넘보지 못한 꿈의 무대에 한국 선수로서는 첫발을 내디뎌 1000만 달러의 사나이로까지 등극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지만, 오랜 부상과 슬럼프로 마이너리그로 다시 추락하기도 했다.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 신세가 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불펜투수로 보직을 바꿔 재기에 성공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만든다고 해도 이보다 더 극적인 인생의 연속은 찾아내기 힘들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박찬호에게도 자신의 야구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박찬호는 그 고비 때마다 때로는 탁월한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다.

 

박찬호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택은 역시 빅리그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국내 시절만 해도 재능은 있었지만 단지 공만 빠른 유망주에 불과했던 박찬호는 절대 미국에서 통할 리가 없다.’는 세인들의 예상을 비웃듯, 마이너리그에서 몇 년간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빅리그에 입성했고, 명문팀 LA 다저스에서 한때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투수로까지 성장했다.

 

2007년 뉴욕 메츠에서 방출당한 이후, 야구인생의 기로에 놓였던 박찬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재기에 성공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박찬호는 더 이상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평가 속에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지만, 절치부심하여 불펜투수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만일 박찬호가 과거의 명성에만 집착하여 현실에 절망했다면 오늘날 메이저리그 아시안 최다승 투수도 없었을 것이고,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경력도 지금보다는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박찬호의 야구인생에서 최고의 선택들은 대개 당장의 결과물보다는 오랜 시간과 인내를 두고 빛을 발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나쁜 선택들은 대개 한 순간의 치명적인 판단착오나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가 그 동안의 노고를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안타까운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박찬호가 첫 FA 자격을 얻는 과정에서 LA 다저스를 떠나 텍사스 레인저스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박찬호는 이 과정에서만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치명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

 

첫째, 2000년 당시 다저스는 팀내 2~3선발로 성장한 박찬호를 FA 1년 앞둔 시점에서 4년간 약 4000만 달러의 연장계약을 제시하며 박찬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계약 성사를 눈앞에 두고 박찬호의 거부로 불발되었다.

 

둘째, 2001년에 최고시즌을 보내던 박찬호는 시즌 종료 후 얻게 되는 FA 자격을 의식하여 부상을 참고 무리하게 등판을 강행했고, 오히려 이것이 허리부상이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반기에 2점대 평균자책점과 함께 연속 퀄리티스타트 행진을 이어가던 박찬호는 후반기 들어 부진에 빠졌고, 이것은 결국 텍사스 시절까지 박찬호가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는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박찬호는 투수친화적인 다저스 구장을 떠나 아메리칸리그판 쿠어스필드로 불리는 텍사스로 자리를 옮겼다. 박찬호는 2001년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손을 잡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5 6,500만 달러의 대박 계약을 터트렸지만, 대표적인 타자친화적 구장 알링턴 볼파크와 텍사스의 살인적 무더위를 과소평가한 것이 패착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참담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아시안 최다승 투수로 기억되는 박찬호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상당수의 많은 미국팬들(특히 텍사스)에게 박찬호의 이름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먹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박찬호는 2008년 이후 불펜투수로 힘겹게 재기에 성공하지만, 한 팀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저니맨의 행보를 보인다. 오랜 세월이 지나 돌아온 친정팀 LA 다저스나 필라델피아에서는 내용면에서 좋은 투구를 보였고 재계약도 가능했지만, 박찬호는 번번이 다시 팀을 옮겼다.

 

때로는 선발이나 우승에 대한 미련 때문에, 때로는 계약조건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팀을 옮겨 다녔지만 솔직히 대개는 굳이 이적하지 않느니만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필라델피아의 제의를 뿌리치고 양키스를 선택했다가 반년 만에 방출당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최약체 팀인 피츠버그에서 숙원이던 아시안 최다승 투수 기록을 작성한 뒤, 빅리그 경력을 마감하고 일본행을 선택했다.

 

박찬호의 일본행은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결과로만 보면 또 한번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박찬호의 거취는 팬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메이저리그 잔류 혹은 은퇴, 국내 복귀 가능성까지 거론되었지만 정작 박찬호의 선택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본행이었다.

 

박찬호의 커리어나 명예를 생각한다면, 현역 생활 은퇴이건 잔류이건 메이저리그에 남는 것이 아마 가장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박찬호에 관심을 표시한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있었다. 아니면 한국프로야구도 돌아와서 국내 팬들 앞에서 축복을 받으며 명예롭게 야구인생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박찬호는 일본행을 선택했다. 좋은 대우조건과 선발투수 보장은 달콤한 유혹이었고, 은퇴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다양한 야구 환경를 접해본다는 명분도 박찬호를 유혹했다.

 

박찬호에게 일본행은 처음부터 잘해야 본전, 못하면 망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20대처럼 도전혹은 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들로 포장하기에는 박찬호 자신의 적지 않은 나이와 당장의 기량, 그리고 주변 환경 등에 대한 냉정한 현실판단과 상황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오랫동안 불펜투수로만 활약해온데다 전성기의 구속을 잃어버린 박찬호에게 정교한 일본야구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실력으로 극복했으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38세의 용병으로서 당장의 성적과 결과만을 요구하는 높은 기대치는 박찬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결국 박찬호는 일본에서의 만년 하위권 팀에 불과한 오릭스에서도 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2군행의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코칭스태프에게는 일본야구를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니냐.”는 쓴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아직 박찬호에게는 남은 시간이 있다. 일본무대에서의 계약기간만이 아니라, 그의 남은 야구인생 전체가 포함된 시간이다. 박찬호의 야구인생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잘못된 선택이 없기를 기대한다.

 

// 구사일생 이준목 [사진=SI.com]

 

 

 블로거는 여러분들의 추천(View On)을 먹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