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압박감이 높아지는 단기전에서 확실한 에이스의 존재감은 더욱 빛을 발한다. 포스트시즌을 앞둔 팀들은 저마다 단기전에서 확실한 1승을 보장할 수 있는 선발투수를 필승 카드로 내세운다. 투수에게도 포스트시즌에 선발로 투입된다는 것은 에이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많은 에이스들이 가을의 아쉬움을 곱씹어야 할 전망이다. 4강행이 좌절된 LG. 두산, 한화, 넥센의 투수들은 모두 아쉬움 속에 내년 시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올 시즌 10승 고지를 넘긴 투수는 모두 14명. 10승 투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SK와 넥센을 제외하면 저마다 확실한 10승대 투수들을 한두 명쯤은 보유하고 있다. 이중 4강 팀에 소속된 투수들은 절반을 조금 넘는 8명에 불과하다. 무려 6명의 투수들은 개인 성적은 두 자릿수 승리를 넘기고도 팀은 가을잔치에 탈락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특히 잠실 라이벌 LG와 두산의 선발투수들에게는 올해 가을잔치를 밟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법하다. 두 팀은 지난 몇 년간 나란히 확실한 선발 투수의 부재로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두 팀 모두 다른 어떤 팀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탄탄한 A급 투수들을 앞세워 리그를 호령했다.
두산의 원투펀치 김선우와 더스틴 니퍼트는 둘이서만 30승을 합작했다. 특히 김선우는 2일 잠실구장서 열린 LG와의 시즌 18차전에서 선발등판 해 6이닝 동안 5피안타 1볼넷 2탈삼진 1실점의 호투로 팀의 11-1 완승을 이끌며 시즌 16승째를 따냈다.
김선우의 시즌 16승(7패)은 2008년 두산 입단 후 시즌 최다 승수다. 종전 기록인 지난해 13승을 벌써 3승이나 뛰어넘었다. 다승 부문 1위인 윤석민(KIA, 17승)과도 불과 1승 차이. 리그 3위에 올라 있는 3.13의 평균자책점도 데뷔 후 최고 기록이다.
외국인 투수 니퍼트도 14승(6패)를 수확하면서 지난해 활약했던 히메네스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웠다. 김선우와 니퍼트의 조합은 그 동안 두산의 역대 단일시즌 최강 원-투 펀치로 꼽혔던 95년의 김상진-권명철(합작 32승), 2007년의 다니엘 리오스-맷 랜들(합작 34승) 조합과도 어깨를 견줄만한 올 시즌 프로야구 최강의 원투펀치다.
두 선수는 또한 에이스의 또 다른 덕목인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에 있어서도 시즌 18회로 윤석민(KIA), 송승준(롯데)과 이 부문 공동 1위를 달리고 있다. 두산은 지난해까지 가을잔치 단골손님이었으나, 올해 5년 만에 고배를 마셨다. 작년까지는 늘 선발투수진이 고비마다 발목을 잡았다면, 올해는 다른 모든 면이 총체적 난국이었다.
단기전에서 확실한 선발투수 2~3명만 있으면 시리즈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올해처럼 최고의 활약을 펼친 에이스를 두 명이나 데리고 있음에도 가을잔치를 밟지 못했다는 것은 두산에게 아이러니였다.
LG도 마찬가지다. 2009년과 2010년에는 봉중근만이 두 자릿수 승리를 간신히 넘는데 그쳤던 LG는 올 시즌 봉중근이 일찌감치 전열에서 이탈했음에도 무려 세 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했다. 박현준(13승)을 시작으로 레다메스 리즈(11승)와 벤자민 주키치(10승)가 그 주인공들이다. LG가 중반까지 4강 싸움을 펼치면서 ‘일단 포스트시즌에만 오르면 단기전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선발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박현준은 지난해 SK에서 이적하여 올해 첫 풀타임을 소화한 투수다. 주키치와 리즈는 LG의 외국인 투수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함께 10승 고지를 돌파했다. 9승의 임찬규가 1승을 더 추가하면 10승 투수가 4명으로 늘어난다. 90년대 이상훈, 김기범, 김태원, 정삼흠 등을 앞세워 선발왕국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던 LG로서는 2000년대 최고의 선발진을 갖추고도 또다시 가을잔치와 9년째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한화에는 역시 설명이 필요 없는 국가대표 에이스 류현진이 있다. 류현진은 올 시즌 부상과 슬럼프로 고전하면서도 6년 연속 10승 고지를 돌파하며 에이스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한화를 떠나 8개 구단 전체를 돌아봐도 같은 기간 류현진보다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선발투수는 없다.
그러나 팀은 올해도 가을잔치 무대를 밟지 못했다. 대한민국 최강의 에이스로 꼽히는 류현진이지만, 팀 사정으로 인하여 포스트시즌의 추억은 2007년을 마지막으로 끊겨있다. 데뷔 첫해인 2006년 한 차례 한국시리즈에 올랐으나 준우승에 그쳤고, 이후로는 아직 우승에 도전할 기회를 얻지 못한 류현진이기에 가을잔치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