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에게 불혹이란 보통 사람의 나이로 치면 칠순에 가깝다. 예전 같으면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다. 하지만 아직도 팔팔한 ‘현역’으로 그라운드에서 땀 내음을 맡는 것을 더 즐기는 선수들이 있다. 나이와 세월이라는 장벽은 그들의 야구를 향한 열정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다음 시즌에도 프로야구에서 활약할 예정인 40대 선수들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역 최고령 이종범을 비롯하여 LG 최동수, SK 박경완과 박재홍, 한화 박찬호, 넥센 송지만 등이 그 주인공이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지만 이들은 여전히 실력과 경험, 그리고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스무살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후배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1970년생인 이종범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프로야구계의 ‘맏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게 된다. 올해부터 KIA의 새로운 사령탑에 오른 선동열 감독은 90년대 해태와 일본 주니치 시절 이종범과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선후배지간이다. 이종범은 현재 타이거즈 멤버 중 해태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유일한 현역 선수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팬들 사이에서는 ‘이종범의 은퇴시기와 여자 연예인들의 몸무게는 영원한 미스터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이종범의 은퇴시기가 언제냐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종범은 올해도 변함없이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빌 예정이다.
구단은 이미 이종범의 은퇴시기는 100% 본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결정했고, 선동열 신임감독도 이종범의 가치를 인정했다. 단지 프랜차이즈스타이고 최고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KIA에서 실력으로 이종범을 압도할만한 외야수는 많지 않았다. 이종범 역시 많지 않은 출전시간 동안 공수와 주루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했다.
박찬호(한화)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프로야구계의 핫이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동양인 최다승 기록 보유자인 박찬호는 지난 해를 끝으로 18년간의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국내 프로야구에 첫 선을 보인다. 박찬호는 벌써 다음시즌 한화의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풍부한 관록에서 오는 노련미와, 이름만으로도 관중들을 불러모으는 스타성은 팬들을 설레게 한다.
최동수와 박재홍은 오른손 대타 요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SK에서 LG로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거친 최동수는 여전히 필요할 때 한 방을 날려줄 수 있는 해결사 본능을 지니고 있다. 이택근의 공백으로 믿을만한 오른손 타자와 1루수 요원이 부족한 LG에서는 다음 시즌 최동수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최동수가 빠진 SK 타선에서는 박재홍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올 시즌이 끝나고 한때 은퇴의 기로에 몰리기도 했던 박재홍은 이제 현역 선수로서의 명예회복은 물론이고, 선수협 회장직을 맡아 프로야구 선수들의 대표라는 상징성까지 안게 되어 어깨가 더욱 무겁다.
중요한 사실은 불혹의 선수들이 그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선수로서 엔트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그 선수들이 팀에 필요하고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이유다. 프로의 세계에서 옛날의 이름값이란 무의미하다는 것은 선수들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선수들은 ‘나이가 들어서 은퇴는 안하고 후배들을 앞길이나 막는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솔선수범하고 두 배의 땀을 흘린다.
나이든 선수들이 흔히 가장 듣기 싫어하는 뻔한 질문들이 있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시절 ‘은퇴 계획은 언제쯤이냐’는 질문에 ‘당신은 그럼 언제까지 살 계획이냐’고 응수했다. ‘노장이 어쩌고’하는 표현도 금기어다. 많은 선수들은 ‘노장’이라기보다는 ‘베테랑’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나이든 선수들에게 흔히 붙는 수식어인 ‘정신적 지주’ 운운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직 당당히 실력으로 검증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선수들을 경기외적인 이미지나 역할에 가두어두려는 듯한 편견 때문이다. 이종범은 “솔직히 야구를 잘해야 후배들에게 할말도 있는 것이다. 야구도 잘 못하면서 선배니, 정신적 지주니 하면 후배들이 과연 그런 선배를 인정하겠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나이든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2010년 은퇴한 양준혁은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큰 강적이자 라이벌이 누구냐는 질문에 “나이에 대한 편견”이라고 답변한바 있다. 노장 선수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선입견, 은퇴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깨고 싶다는 의지야말로 자신이 더욱 이를 악물고 분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양준혁은 40대를 넘겨서도 충분히 야구를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의 기회를 얻지 못했고 2010년에 은퇴를 결정했다.
양준혁이 못다 이룬 꿈은 이제 또 다른 불혹을 맞이한 후배 선수들의 몫이다. 그들은 오늘도 그라운드에서 나이가 아닌 유니폼에 쓰여진 이름과 등번호로서만 공정하게 평가받고 싶어한다.
// 야구타임스 이준목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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