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야구기자들의 수준이 얼마나 저질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결과였다. 팬들은 분노했고, 부끄러워했고, 또 미안해했다. 올 시즌 최고 투수가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하는 촌극이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지 15년째인 2012년에도 그대로 재현될 줄이야.
12월 11일 오후 2012년 팔도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열렸다. 그 결과 10명의 선수들이 황금장갑을 수상하며 올 한 해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10명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선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보 선정 기준 자체가 모호했을 뿐, 일단 후보로 오른 이상 이승엽이 이호준을 제치고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성적만 놓고 보면 김원섭이 월등하지만, 유독 타이틀 수상자에게 관대했던 우리나라 야구 기자들이 이용규에게 표를 몰아줄 것 역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2루수 부문 역시 마찬가지다. 당초 이번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안치홍과 서건창이 경합을 벌일 2루수 부문의 주인공이었고, 결과적으로 신인왕 서건창이 황금장갑까지 거머쥐었다. 물론, 팬들은 이와 같은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도루를 제외하면 올해 성적에서 서건창이 안치홍에게 앞서는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 눈물 어린 서건창의 인생 성공 스토리를 완성시켜주기 위해 안치홍을 들러리 취급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 우리나라 야구 기자들이 보여줬던 저열한 수준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딱히 ‘이변’이라고 표현할 만큼 기가 막히진 않다. 최정이 여유 있게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우승 프리미엄’이 ‘현격한 실력 차’를 뒤집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한 대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명실상부한 올 시즌 최고 투수가 어이 없이 수상자가 되지 못하고 고배를 마시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투수 부문에서는 다승왕 장원삼이 총 351장의 유효표 가운데 128표를 획득해 121표의 나이트를 제치고 수상자로 선정됐다.
나이트 - 30경기 16승 4패 2완투 1완봉 208⅔이닝 27QS 평균자책점 2.20
장원삼 - 27경기 17승 6패 0완투 0완봉 157이닝 14QS 평균자책점 3.55
정말 가소롭기 그지 없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다. 애당초 이 둘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이트는 올 시즌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 제일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선발투수다. 30경기에서 무려 27번의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는 등 90%의 성공률을 보였다. 승운이 따르지 않아 다승 2위에 그쳤으나, 이미 올 시즌 나이트의 성적은 승수를 논할만한 레벨을 넘어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선수가 ‘팀을 잘 만난 덕분에’ 다승 1위가 된 선수에게 황금장갑을 빼앗겼다. 나이트보다 50이닝이나 덜 던지고, 퀄리티스타트 회수가 절반 수준에 불과하며, 평균자책점 16위에 불과한 장원삼이 황금장갑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은 웃음밖에 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다.
나이트, 유먼, 류현진, 노경은, 서재응, 이용찬, 윤석민, 니퍼트, 김진우, 그리고 장원삼이다. 다승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떼어 놓고 투구내용(이닝, 피안타율, WHIP, QS) 등을 토대로 살펴본 올 시즌 선발투수 랭킹에서 장원삼은 잘 봐줘야 리그 10위권에 간신히 드는 수준이다. 그런데 장원삼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누가 봐도 올 시즌 최고 투수임이 확실했던 나이트는 2위에 머물렀다.
무려 351장이나 되는 유효표 가운데 나이트를 외면한 사람이 무려 230명으로 전체의 3분의 2에 육박한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고, 그 230명 중 128명이나 장원삼을 택했다는 결과도 납득할 수 없다. 대체 ‘야구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우승 프리미엄’ 정도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결과가 눈 앞에 펼쳐졌다. 이는 명백한 ‘외국인 선수 차별’이며, 한국 야구기자들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최악의 사태다. 외국인 선수 제도를 영입한 후 15년이나 지났음에도 우리나라 야구 기자의 수준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이 사태에 대해 동종 업계에 한발 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담함 심경을 금할 길이 없다.
<2010년 AL 사이영상 투표 결과>
1위. 펠릭스 에르난데스(1위표 21장) – 249⅔이닝 13승 12패 2.27
2위. 데이빗 프라이스(1위표 4장) - 208⅔이닝 19승 6패 2.72
3위. C.C. 사바시아(1위표 3장) - 237⅔이닝 21승 7패 3.18
재작년 메이저리그에서는 사이영상 투표에서 기념비적인 일이 벌어졌다. 고작 13승밖에 얻지 못한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각각 6승과 8승의 차이를 극복하고 총 28장의 1위표 중 21장을 휩쓰는 압도적인 차이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에르난데스가 제일 긴 이닝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을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이 인정해준 결과였다. 심지어 다승왕이었던 사바시아는 30이닝 가까이 많이 던졌음에도 평균자책점이 낮았던 프라이스에게 2위 자리까지 내주고 말았다.
결과와 더불어 주목할 것은 유효투표 숫자다. 투표인단이 고작 28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이처럼 수상자를 결정지을 수 있는 투표권을 아무에게나 남발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30개 구단의 연고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성 있는 기자(혹은 매체)들을 2명씩 선정하여, 총 60명에게만 MVP와 사이영상, 그리고 신인왕의 투표 자격을 주고 있다. 아메리칸리그는 14개 팀이기 때문에 28명의 기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 올해까지 8개 구단이었던 우리나라의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는 무려 351명이 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 351명 중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 상당수 존재하는 듯 보인다. 팬들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수준 낮은 야구 기자가 MVP를 뽑고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결정한다니,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한국 야구의 수준은 메이저리그보다 낮다. 하지만 기자들의 수준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다. 일부, 아니 상당수 야구 기자들의 빗나간 ‘애국심’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장원삼을 ‘부끄러운 수상자’로 만들고 말았다. 장원삼 역시 이 일의 피해자 중 하나일 뿐이다.
대체 골든글러브 시상식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투표권은 무슨 기준으로 나눠주고 있단 말인가? 이번 결과는 역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하나로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 틀림 없다. 누가 뭐래도 2012년 한국 프로야구 최고 투수는 넥센 히어로즈의 외국인 투수 브랜든 나이트였다.
// 카이져 김홍석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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