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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랜디 존슨, 그리고 역대 최고의 좌완

by 카이져 김홍석 2008. 6. 9.


랜디 존슨(4680개)이 얼마 전 로저 클레멘스(4672개)를 제치고 통산 탈삼진 랭킹 2위로 점프했다. 1위인 놀란 라이언(5714개)의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서 역대 기록의 최상위권에 랭크되었다는 점은 분명 기념할만한 사실이다. 9이닝 당 탈삼진은 10.76개로 당당히 역대 1위다.(놀란 라이언은 9.55개로 케리 우드와 페드로 마르티네즈에 이은 4위)

지난해 통산 284승을 거둔 후 시즌 아웃 되면서, 300승이 불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냐는 전망도 있었으나, 올해 다시 메이저리그에 복귀해 4승 2패 방어율 3.88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전성기 시절의 이닝이터 다운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팀에 도움이 되는 수준임에 분명하다. 올해는 힘들겠지만, 내년까지 현역으로 남을 수 있다면 300승 달성 가능성은 충분하다.

5번의 사이영상과 통산 탈삼진 2위, 288승 152패 방어율 3.23을 기록 중인 좌완 랜디 존슨. 그는 이제 단순히 현 시대를 지배한 한 명의 위대한 투수가 아니라,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힐만한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향후 명예의 전당 행 가능성은 당연히 100%다. 그렇다면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도 랜디 존슨은 향후 메이저리그 팬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을 때, 절대 빠지지 않고 언급될 이름임이 틀림없다. 만약 랜디 존슨이 300승을 달성하게 되면 ‘역대 최고의 좌완’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랜디 존슨과 비교될 만한 메이저리그를 빛낸 역사 속의 좌완 투수들을 살펴본다.

▶ 샌디 쿠펙스(1955~66)

사이영상 수상 3회, MVP 1회, 투수 3관왕 3회
방어율 1위 5회, 다승 1위 3회, 탈삼진 1위 4회
통산 165승 87패 탈삼진 2396개 방어율 2.76

박찬호와의 인연으로 한국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다저스의 전설적인 좌완 투수 샌디 쿠펙스. 그의 12년의 선수 생활은 평범했던 7년과 위대한 5년으로 나눌 수 있다. 1962년을 기점으로 평범함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젊음을 불태웠던 선수 생활의 마지막 5년 동안 매년 방어율 1위를 차지하며 리그를 지배하는 투수로 군림했다.

3번의 투수 3관왕과 그로 인한 3번의 만장일치 사이영상. 62년부터 66년까지 쿠펙스는 1377이닝을 소화하면서 1.95의 엽기적인 방어율로 111승 34패를 기록했고 1444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라이브볼 시대가 열린 후(1920년 이후) 연속된 5년의 합산 방어율이 1점대로 기록된 것은 쿠펙스가 유일하다.(2위는 2.10을 기록한 1994년부터 98년까지의 그렉 매덕스)

단, 전문가들 가운데 쿠펙스를 ‘역대 최고의 좌완’으로 평가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ESPN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제이슨 스탁스는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 받은 좌완 투수’를 언급하면서 쿠펙스를 가장 첫 번째로 언급하기도 했다. 아무리 전성기가 강렬했다고 한들, 200승도 채우지 못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한 선수에게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는 과분할 수밖에 없다. 랜디 존슨은 이미 쿠펙스를 능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스티브 칼튼(1965~88)

사이영상 4회, 투수 3관왕 1회
방어율 1위 1회, 다승 1위 4회, 탈삼진 1위 5회
통산 329승(역대 11위) 244패 탈삼진 4136개(4위) 방어율 3.22

1983년까지, 그러니까 놀란 라이언에게 통산 탈삼진 개수에서 추월당하기 전이며 로저 클레멘스와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이 나타나기 전까지, 스티브 칼튼은 유일한 사이영상 4회 수상자였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탈삼진을 잡아낸 투수였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놀란 라이언은 화려하기는 했으나 리그를 고질적인 컨트롤 불안 때문에 리그를 지배하는 투수가 될 수는 없었다. 꾸준한 활약을 선보이며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로 인정받았던 것은 라이언이 아니라 칼튼이었다.

이후 매덕스가 칼튼의 뒤를 이어 사이영상 4회 수상자가 되고(그것도 4년 연속으로), 탈삼진 부문에서 칼튼을 4위로 밀어내버린 로저 클레멘스(7회)와 랜디 존슨이 그 이상의 수상 회수를 기록하면서 칼튼에 대한 기억은 많이 희석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첫 번째 도전에서 9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이 선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좌완’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힐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 워렌 스판(1942~65)

사이영상 수상 1회, 방어율 1위 3회, 다승 1위 8회, 탈삼진 1위 4회
통산 363승(역대 6위) 245패 탈삼진 2583개 방어율 3.09
20승 13회, 17년 연속 14승-200이닝 이상

‘역대 최고의 좌완’이라면 이 선수도 결코 빠질 수 없다. 역대 좌완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승을 기록한 선수임과 동시에 라이브볼 시대(1920년 이후) 최다승 투수이기도 한 워렌 스판. 그는 브레이브스의 전설이며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투수였다.

사이영상 수상은 1회에 그쳤지만, <스포팅 뉴스> 선정 ‘올해의 투수’에는 4차례나 뽑혔다. 만약 사이영상이 좀 더 빨리 만들어지고, 지금처럼 리그별로 한 명씩 뽑는 방식이었다면 스판의 사이영상 수상 회수는 4번이 되었을 것이다. 방어율-다승-탈삼진에서 그 많은 타이틀을 획득하고도 투수 3관왕을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 그는 50~60년대를 지배했던 최고의 투수였다.

스판의 라이브볼 시대 최다승 기록을 넘보고 있는 그렉 매덕스는 또한 17년(1988~2004) 연속 15승 이상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스판도 꾸준함과 다승에 있어서는 전혀 꿇릴 것이 없다. 스판은 1947년부터 63년까지 17년 연속으로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14승 이상을 기록했다. 1952년 부실한 팀 타선 때문에 2.98의 방어율(리그 11위)로 14승 19패를 기록하는 바람에 매덕스에게 기록의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었을 뿐, 그 17년 동안 거둔 승리(342승)는 매덕스(297승)를 월등히 앞선다. 17시즌 동안 무려 13번이나 20승을 달성한 선수(20세기 초에 활약한 크리스 매튜슨과 더불어 메이저리그 공동 1위의 기록)에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 레프티 그로브(1925~41)

MVP 1회, 투수 3관왕 2회
방어율 1위 9회, 다승 1위 4회, 탈삼진 1위 7회
통산 300승 141패 탈삼진 2266개 방어율 3.06

오클랜드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선수생활을 한 레프티 그로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재 상황으론 향후 랜디 존슨이 그로브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워렌 스판이 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2인자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로브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투수들도 충분히 위대하고 전설로 불릴만한 선수들이었지만, 그로브에 대한 평가는 그 겪이 조금 다르다. 그는 단연코 압도적인 지지로 ‘역대 최고의 좌완’이라 불릴 만한 선수이며,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를 논할 때도, 월터 존슨과 더불어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선수다. 쿠펙스, 칼튼, 스판 등과는 충분히 같은 선상에서(또는 한 수 위라고) 평가할 수 있는 랜디 존슨이라 하더라도 ‘레프티’라는 별명을 얻은 그로브를 넘볼 수는 없다.

그로브의 통산 방어율은 2점대가 아닌 3.06에 불과(?)하다.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위대한 좌완 투수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타자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에 활약하면서 9번이나 방어율 1위(메이저리그 기록)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메이저리그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등의 위대한 타자들이 각종 타격 부문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기록을 만들고 있었고, 그로브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돋보였던 단 한 명의 투수였다.

통산 방어율 순위는 177위에 불과하지만, 리그의 평균 방어율과 비교해 그 선수의 방어율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조정 방어율’ 순위(3000이닝 투구 이상)에서는 월터 존슨(147)을 제치고 역대 1위(148)에 올라 있는 선수가 바로 그로브다. 당시에 사이영상이 존재했다면 그로브는 적어도 5회, 좀 더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면 아마도 7회 정도는 수상했을 가능성이 크다.

랜디 존슨이 그로브의 위치를 넘보려면, 적어도 350승 또는 놀란 라이언의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 치우는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존슨이 넘볼 수 있는 자리는 2인자의 자리.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300승을 달성한다면, 그에게 그로브의 뒤를 잇는 제 2인자의 자리를 허락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