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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역사에 아쉬운 이름을 남긴 투수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7. 24.

지난 5월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커트 쉴링은 지역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본즈가 통산 754홈런을 기록 중이고 펜웨이파크에서 본즈와 맞닥뜨린다면 정면승부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며 “나는 알 다우닝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메이저리그를 오랫동안 봐온 팬이라면 쉴링이 언급한 알 다우닝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산 123승을 거둔 평범한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메이저리그의 역사나 명장면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위대한 기록의 슬픈 조연이었기 때문이다.


1974년 4월 8일 미국 전역을 들끓게 만든 한 사건이 터졌다. 주인공은 전년도 마지막 13경기에서 3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쳐 713홈런으로 아쉽게 시즌을 마감했던 행크 아론이었다. 수많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시즌 첫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와 동률을 이루는 714호 홈런을 날리더니, 4월 8일 자신의 시즌 3번째 경기에서 4회말 2번째 공을 받아쳐 좌측 담장을 넘겨버린다. 아론을 진정한 영웅으로 등극시키고 메이저리그의 홈런 역사를 바꿔버린 715호 홈런이었다.


바로 아론에게 신기록을 헌납한 이가 다져스의 좌완투수 알 다우닝이었다. 아론의 이름이 영광스런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데 반해, 다우닝은 그러한 아론의 영웅 등극을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기록을 앞두고 있는 타자와 정면승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알 다우닝의 이름은 그다지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그렇다. 본즈가 타이기록까지 2개만 남겨두고 있는 이때, 755호 홈런의 재물이 되거나 756호를 헌납한 투수라면 그 이름은 역사에 남게 된다. 정면승부를 피하고 도망치는 이들은 오히려 그 이름이 비켜가겠지만, 경기에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들은 오히려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 후로도 한참동안이나 하이라이트 필름에 등장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커트 쉴링 정도의 투수가 그런 말을 했을까. 알 다우닝만이 아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메이저리그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이유로 기록지에 남아 있는 투수들이 있다. 부정 투구나 난투극이 아닌, 순수하게 타자와의 승부를 택한 결과로 나타난 사건들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오명을 남겨야 했던 수많은 선수들이 있지만,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건을 중심으로 몇 명만 소개해 보려 한다.


▷ 알 다우닝(Al Downing)

먼저 위에서 이미 언급한 알 다우닝이다. 1961년 20세의 나이로 빅리그에 첫 발을 내딛었을 정도로 Alphonso Erwin Downing이라는 본명을 가진 이 선수는 원래 상당한 포텐셜을 가지고 있던 유망주였다. 폭발적인 패스트볼과 춤추는 듯 한 커브는 그에게 ‘the black Sandy Koufax’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


하지만 9이닝 당 3.7개에 달하는 볼넷을 허용할 정도로 컨트롤이 좋지 않았던 그는 기대만큼의 성장을 하지 못하고 만다. 그럭저럭 선발로테이션을 지킬 정도의 투수로 양키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다우닝은 1971년 LA 다져스로 이적을 하게 되고 그 해 20승 9패 12완투 5완봉 방어율 2.68의 빼어난 성적으로 사이영상 투표에서 3위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그게 전부였다.


메이저리그 14년차가 되던 3년 후 아론에게 신기록 홈런을 맞으면서 그는 아론과 함께 헤드라인 뉴스를 장식했다. 17년의 선수 생활동안 크게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데뷔 시즌과 은퇴 시즌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방어율이 4점대로 올라간 적이 없을 만큼 꾸준한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팬들은 아론에게 홈런을 허용한 투수로만 다우닝을 기억하고 있다.


▷ 트레이시 스탤러드(Tracy Stallard)

알 다우닝이 양키스 선수로 빅리그에 데뷔하던 해 스텔러드는 선발과 중간을 오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2년차 투수였다. 시즌 막판 뉴욕 양키스와의 최종전에서 선발로 등판한 스탤러드는 7이닝 동안 5피안타 1볼넷으로 1실점하며 좋은 투구내용을 보였지만, 팀 타선이 침묵하며 1:0으로 패하고 말았다.


문제는 스탤러드가 한 유일한 실점이 홈런으로 인한 점수였고, 그 홈런의 주인공이 양키스 3번타자 로져 메리스였다는 것이다.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뛰어넘는 61호째 홈런이었다.


베이브 루스의 신봉자들로부터 스탤러드에게 쏟아진 비난과 협박은 다우닝과 비교할 수 없었다. 아론의 경우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한 언젠가는 새로운 기록이 탄생되었겠지만, 스탤러드가 매리스에게 홈런을 허용한 시합은 시즌 최종전이었다. 피하려고 마음만 먹었더라면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는 24살의 나이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듬해에는 빅리그에서 단 1이닝을 던지는데 그쳤고, 겨우 복귀한 63년에는 17패, 64년에는 20패를 당하는 등, 66년을 끝으로 리그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윌리 메이스(30타수 6안타), 윌리 맥코비(33타수 5안타), 로베르토 클레멘테(29타수 4안타), 프랭크 로빈슨(28타수 6안타) 등의 전설적인 강타자들의 천적이었던 스탤러드. 이 젊은 투수가 택한 한 번의 정면승부가 가져온 아쉬운 결말이었다.


▷ 알 레이예스(Al Reyes)

올시즌 템파베이 데블레이스의 마무리 투수로 변신해 깜짝 놀랄만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알 레이예스에게도 잊고 싶은 기억이 하나 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뛰던 지난 2005년 8월 31일 플로리다 마린스와의 경기, 7회 말 무사 만루상황에서 레이예스는 팀의 3번째 투수로 등판한다.


이미 시합는 10:0으로 앞선 카디널스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마침 투수의 타석이라 잭 맥키언 감독은 전날 콜업된 유망주 제레미 허미다를 타석에 올린다. 결과는 만루 홈런. 허미다가 빅리그 데뷔 첫 타석 만루 홈런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미 107년 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빌 더글비라는 선수가 데뷔 첫 타석에서 같은 기록을 세운 적이 있지만, 그 선수는 투수였다. 재밌게도 자신이 처음 등판한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때린 것이다. 그러니 순수한 타자로서는 허미다가 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케빈 쿠즈마노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로 데뷔한 작년, 텍사스 레인저스의 에디슨 볼케즈를 상대로 3번째 동일한 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선발 출장이었던 쿠즈마노프보다는 대타 출장이었고 거포 유망주였던 허미다가 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후세에 레이예스의 이름이 오랫동안 회자되지 않기 위해선, 허미다가 전설적인 홈런 타자로 성장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참고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이 보다 더한 기록이 나온 적이 있다. 2001년 6월 23일 두산의 송원국은 9회 말 2사 만루 상황에 들어선 데뷔 첫 타석에서 끝내기 만루 홈런을 날린다. 그것도 SK 투수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쳐서 만들어낸 진정한 드라마였다.


▷ 칼 메이스(Carl Mays)

빅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빅 트레인’ 월터 존슨이 한창 전성기였던 시절, 그가 단 2개의 공으로 삼진을 잡았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너무나 위력 있는 2개의 공이 모두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며, “이봐~ 아직 투 스트라이크야”라고 외치는 심판에게 되려 “지금 나랑 농담하세요?”라고 되물었던 타자, 그의 이름은 레이 채프먼(Ray Chapman)이었다.


빠른 발과 뛰어난 야구센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번트 기술로 무장한 이 젊은 유격수는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펼쳐 보지도 못한 채 1920년 29살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는 그와의 동갑내기 투수 칼 메이스였다.


1920년 8월 16일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슬픈 사건이 일어난다. 리그 1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뉴욕 양키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 4회말 양키스의 에이스인 칼 메이스의 투구에 머리를 얻어맞은 채프먼이 그대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헬멧 등의 가장 기초적인 보호 장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미 2번의 20승을 달성했던 투수였고, 문제의 1920년에는 26승으로 리그 다승 2위에 올랐던 재능 있는 언더핸드 투수가 바로 칼 메이스였다. 312이닝을 던지는 동안 허용한 몸에 맞는 공은 단 7개. 고의로 머리를 노렸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메이스는 채프먼의 머리를 강타하고 흘러나온 공을 타자가 방망이로 때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1루에 던지기까지 했다.


이 후 메이스는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되고 메이저리그에서 영구히 추방해야 한다는 탄원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개의치 않았는지 좋은 성적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이듬해 27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따내는 등 5번의 20승 시즌을 보내며 207승 126패 방어율 2.92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다.


사실 이 사건이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후 잠수함 투수는 거의 다 사라져 버렸고, 그의 이름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의 주인공으로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 박찬호

홈런으로 인해 아쉬운 이름을 남긴 투수를 언급하자면, 역시나 박찬호를 빼놓을 수가 없다. 하나가 아니라 3개씩이나 되는 진기록에 연관이 되어 있고, 모두가 하나같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아니 어쩌면 메이저리그가 존재하는 한 잊혀 지지 않고 기억될 명장면들이었다.


1999년 4월 2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허용한 한 이닝 두 개의 만루 홈런, 2001년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한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립켄의 MVP 등극에 일조했고, 그 해 마지막 등판이었던 10월 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70홈런을 기록 중이던 배리 본즈에게 1회말 71호 째를 허용하고, 이어진 3회에 72호 홈런까지 헌납했다.


메츠 시절 트리플 A에서 동료로 뛰기도 했던 타티스의 기록은 감독이 제정신인 다음에야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것이고, 요즘의 추세 같아서는 본즈의 홈런 기록도 언제 깨질 지 알 수 없다. 립켄에게 허용한 홈런도 그의 연속경기 출장 기록(2632경기)이 깨지지 않는 한 매년 올스타전이 열릴 때마다 추억의 명장면 1순위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