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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메이저리그에 ‘스몰 볼’은 없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9. 9.

1번 타자의 역할과 자질은 최근으로 들어서면서 확실히 바뀌는 것을 지난 번 칼럼인 [지금은 장타력 있는 1번 타자의 시대]에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보내기’가 주 임무였던 2번 타자의 역할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3~5번의 클린업 트리오의 임무는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에 비해 어떻게 다른지도 간단하게 집어보려 한다.


메이저리그에도 ‘스몰 볼’이 존재할까? 지난 번 칼럼에서 바뀌고 있는 1번 타자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것도, 이어서 타순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도, 사실은 최근 유행처럼 나돌고 있는 ‘스몰 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작은 야구’의 핵심 2번 타자


보통 일반적인 야구팬이 알고 있는 2번 타자라면, 1번 타자가 출루했을 때 그를 진루시키기 위한 희생번트에 능하고 히트 앤 런(Hit & Run) 등의 작전 수행능력이 좋은 선수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장타력은 비교적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센스가 있는 선수가 보통 2번 타순에 들어서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선수는 결국 1번 타자보다는 정확도와 스피드가 떨어지고, 하위 타순인 7,8번 타자보다도 파워가 떨어지는 약간은 어정쩡한 선수들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로 유격수, 2루수 등의 수비 지향적인 포지션의 선수들이 부족한 타격실력에도 불구하고 2번 타순에 배치되곤 했다. 오로지 주자의 진루를 최우선에 두고 말이다.


메이저리그도 이와 비슷했다. 특히 리그 전체 방어율이 2점대(1968년 내셔널리그 전체 방어율 2.99)로 내려가기도 했던 60년대와 70년대에는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기도 했었다. 투수들의 시대가 저무면서 90년대에 들어선 뒤에도 1번 타자의 역할은 조금씩 바뀌어 갔지만 2번 타자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서 이상적인 2번 타자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오마 비스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이다. 2할대 후반을 쳐줄 수 있는 정도의 정교함과 30개의 도루를 기대할 수 있는 빠른 발, 그리고 매년 두 자리 수를 기록하는 희생 번트까지. 아지 스미스와 역대 최고의 유격수 수비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 선수야 말로 기존의 시각에서 최고의 2번 타자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는 희생번트라는 작전 자체가 그다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오마 비스켈이 워낙 독보적(통산 232개-현역 1위)으로 실행했을 뿐, 현역 선수 중 통산 100회를 넘긴 선수는 단 6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2,3,4,6위는 모두 투수(탐 글래빈, 그렉 매덕스, 존 스몰츠, 커트 쉴링)다. 비스켈 외에 100회를 넘긴 선수는 5위에 올라있는 로이스 클레이튼(113회) 밖에 없다.


당시나 지금이나 희생번트는 메이저리그에서 그다지 자주 사용되는 작전이 아니었다. 특히 세이버 매트리션들은 한 베이스 더 진루하기 위해 아웃 카운트 하나를 소비하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2번 타자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얼마나 번트를 잘 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작전 수행 능력이 좋고 상황에 대한 대처가 뛰어난가’였다.



‘2번 타자’를 다시 보게 만든 에이로드 & 지터


이러한 기존의 시각을 통째로 사라지게 만든 두 명의 천재가 있었다. 지금은 양키스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데릭 지터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90년대 후반 혜성처럼 등장한 이들 때문에 2번 타자에 대한 시각 자체가 흔들려 버린다.


1996년 .358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할 당시의 에이로드는 2번 타자였다. 54개의 2루타와 36개의 홈런은 당시 2번 타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성적. 2번 타자가 MVP 투표에서 2위에 오른 것도 진풍경이었으며, 2년 후에는 40-40까지 달성해 버린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뒤져봐도 이만한 거포 2번 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2번 타자치고는 상당히 많은 삼진을 당하면서도 언제든지 타격왕을 위협할 수 있는 고타율과 평균 이상의 장타력으로 무장한 데릭 지터는 더더욱 놀랍다. 에이로드는 결국 3-4번 타자로 타순을 바꿨지만, 지터는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2번 타자다.


지터야 말로 ‘역대 최고의 2번 타자’라 칭할 수 있을만한 선수이며, 새로운 2번 타자의 이상적인 모델이 된 것이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2번 타자는 더 이상 1번 타자와 클린업 트리오를 연결해주는 단순한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타선 전체의 뼈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타순이 되었다.


각 타순별의 성적을 비교하자면 지난 1995년만 하더라도 2번 타자(.271/.341/.396)는 다른 타순과 비교했을 때 타율과 출루율은 6위 장타율은 7위에 불과했다. 팀에서 6~7번째 수준의 타자가 맡게 되는 타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위상이 많이 변했다.


작년 시즌 메이저리그의 2번 타자(.284/.345/.425)는 타율은 3번 타자와 함께 공동 1위, 출루율은 1번 타자보다도 앞서는 4위, 장타율은 6위였으며 OPS(출루율+장타율)에서도 1번과 6번 타자를 제치고 4위의 기록을 남겼다. 이제 2번 타순은 팀 내에서 4~5번째 수준의 타자가 맡는다.


올해도 데릭 지터(89득점/.320)를 비롯해 내셔널리그 타격왕 후보인 에드가 렌테리아(.336), 아메리칸 리그 타격 3위 플라시도 플란코(90득점/.340), 올랜도 카브레라(93득점/.310), 댄 어글라(28홈런 96득점), 호세 비드로(.310), J.J. 하디(23홈런 73타점), 쉐인 빅토리노(.286/34도루), 마쓰이 가즈오(.292/30도루) 등이 2번 타순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 클린업 트리오 왈(曰) : 스몰 볼? What?


‘팀의 중심 타자라도 기회가 되면 희생번트를 시키겠다.’ 라는 요미우리 하라 감독의 발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실제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1점 차 승부이거나 중요한 경기라면 팀의 4번 타자가 희생번트를 대는 장면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희생번트를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내셔널리그에서는 매 경기마다 그러한 장면이 연출된다(전체 희생번트의 50%이상이 투수가 기록한 것이다). 그 외에도 하위 타순의 타자들이나 최근 잘 맞지 않는 1,2번 타자들이 희생번트를 대는 것도 심심찮게 보인다.

 
하지만 중심타선인 3~5번 타자가 번트를 대는 경우는 없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플레이라면 얼마든지 환호해주고 함께 기뻐하지만 눈앞의 1점을 위해 클린업 트리오가 희생번트를 댔다가는 홈팬들에게도 비난 받고 외면당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면승부해서 지는 쪽을 택하는 것이 그네들의 정서다.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통용되는 메이저리그의 불문율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많은 홈런이 양산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최근에 그 경향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프랭크 토마스, 카를로스 델가도, 마이크 피아자, 블라드미르 게레로, 리치 섹슨, 트로이 글로스, 팻 버렐, 마크 테익세이라, 라이언 하워드, 마쓰이 히데키, 데이빗 라이트 같은 선수들은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희생번트를 댄 적이 없다.

 

배리 본즈, 알렉스 로드리게스, 알버트 푸홀스, 새미 소사, 짐 토미, 매니 라미레즈, 게리 셰필드, 제프 켄트,  치퍼 존스, 앤드류 존스, 제이슨 지암비, 매글리오 오도네즈, 폴 코너코 등의 선수들도 신인 시절 한 두 번씩 시도했을 뿐 21세기의 시작인 2000년 이후로 단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다.


월드시리즈 7차전 9회말 1점차 상황에서 1사 만루에 타석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이들이 번트를 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정면 승부로 이기기를 팬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클린업 트리오가 의미하는 바와 그 역할은 한-일 양국의 야구와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그 중심타선이 가진 프라이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만약 로드리게스나 라미레즈 같은 타자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하는 감독이 있다면 그는 팬과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야구계에서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메이저리그가 2004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으로 관중 동원 신기록을 세우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힘 대 힘의 승부가 팬들을 경기장으로 모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메이저리그에서 스몰 볼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팬들이 구장을 떠나게 하는 원인에 불과하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현대가 110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115개의 희생 번트를 시도해 1위에 올라있다. 메이저리그는 139경기를 치른 콜로라도 로키스가 69개로 최다다. 하지만 그 중 40개는 투수들이 기록한 것으로 순수한 타자들의 경우는 29개에 불과하다. 팬들이 좋아하는 야구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한국과 일본의 야구가 눈앞에 펼쳐진 당장의 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메이저리그는 승리보다도 팬들을 우선시한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팬들이 원하는 야구로 이기는 것’이다. 홈팬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한 팀의 팬도 납득할 수 있는 승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스포테인먼트’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메이저리그에 ‘스몰 볼’은 없다. 그리고 ‘팬들이 원하는 야구’를 지향하는 선수와 감독들의 노력은 ‘약물 파동’으로 인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팬들이 없는 이기는 야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선수와 감독의 가치관이 되는 그 순간, 프로야구는 끝이다. 프로스포츠의 최우선적인 기준은 어디까지나 ‘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