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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죄 없는 자만 엔키엘을 향해 돌을 던져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9. 12.


악몽과도 같았던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증상)을 이겨내고 투수가 아닌 홈런으로 무장한 채 빅리그에 재입성한 릭 엔키엘이 'HGH(성장호르몬, human growth hormone)'를 1년에 걸쳐 구입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오랜 재기의 몸부림 끝에 멋지게 부활에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칭송받으며 홈런포와 레이저 빔(총알 같은 외야 송구)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그이기에 팬들의 아쉬움이 더 한 듯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밝혀진 이후, 언론의 보도 방식과 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배리 본즈 이후의 또 하나의 훌륭한 희생양이 나타난 것이다. 언론은 어떻게 하면 이 재료를 잘 구워서 맛깔나게 집어 삼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 또다시 시작된 지루한 싸움


약물 복용은 분명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이 메이저리그 규정상 합법이었느냐 불법이었느냐를 떠나서 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었음에 분명하고, 훈련이 아닌 약에 의존해 기량 향상을 꾀하는 것은 프로 선수로서 자존심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다.


약물 복용 자체를 두고 옹호해주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잘못을 했다면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선수 본인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다. 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1996년 내셔널 리그 MVP에 빛나는 켄 케미니티가 2004년 약물 복용 후유증으로 사망한 데 이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크리스 벤와(전 WWE 헤비급 챔피언)도 그 이면에 약물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배리 본즈의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과 관련해 여론은 최악의 상황까지 도달었했다.

 
공교롭게도 엔키엘은 그러한 ‘불신’에 빠질뻔 한 메이저리그를 ‘감동’과 ‘환희’로 바꾸어 놓을 뻔 했던 선수였다. 그런 그가 약물에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그 뒤를 이어 2000년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출신인 트로이 글로스와 제이 기번스까지 연달아 HGH를 구입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엔키엘의 이름이 도마 위에 올라오자마자 하루에 한 명꼴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선수가 어떤 모양으로 그 이름을 달고 나올지 모르는 상황. ‘짜고 치는 고스톱’이 생각난다면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워낙에 지겹게 이어지는 약물 관련 사건이라 정확한 경위나 제보자 등은 알고 싶지도 않다. 하루 빨리 이 모든 것이 깨끗하게 해결되어 더 이상 이런 제살 갉아먹기 식의 안타까운 싸움을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용서’와 ‘관용’의 정신으로 바라볼 순 없나


쟝발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레미제라블」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 가운데 ‘용서’와 ‘뉘우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소설 속에서의 이야기일 뿐,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인가 보다.


엔키엘이 성장 호르몬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2004년은 투수로서의 재기를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던 시기였다. 2년을 고생했지만 진전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팔꿈치 이상으로 토미존 수술까지 받았던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호르몬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최고의 자리에서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던 엔키엘이, 그의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도 감옥에 있었던 그 상황에서 선택한 최후의 방법이 마약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HGH가 메이저리그에서 금지약물로 공식 지정된 것은 2005년 1월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엔키엘이 약물을 공급받은 것으로 알려진 시기는 2004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12개월 동안. 대충 감이 잡히지 않는가.


편법이긴 했지만 불법은 아니었던 약물의 힘을 빌어서라도 재기를 노렸던 엔키엘이었지만, 공식적으로 그것이 불법으로 지정되자 더 이상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목적이 어떠했든(본인은 토미존 수술의 재활 과정에서 필요한 의사의 처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호르몬의 효과는 없었고, 투수로서의 마지막 도전까지 실패한 엔키엘은 2005년부터 타자로서 전향을 시도한다.

 
천재로 주목받던 선수가 예상치 못한 심리적인 증상으로 인해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되고, 오랜 시간 동안 부활하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자 약물에까지 손을 댄다. 하지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불법임을 알게 된 후 약물에 손을 끊고, 이제는 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공을 치는 것으로 역할을 바꾸어 3년의 노력 끝에 빅리그에 복귀하여 성공적인 재기를 이루어낸다.


이것은 여전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지금 문제의 초점은 엔키엘이 호르몬을 복용했을 것을 추정되는 시점이 3년 전이라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금지약물로 지정되지 않았던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편법까지 동원해 보려고 했던 그의 절박한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 간다.


무엇보다 엔키엘은 본즈와는 그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본즈가 큰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약물 복용이 계획적이고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엔키엘의 경우는 우발적이고 단기적이었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성장 호르몬이 한창 때인 20대 중반의 청년의 운동능력을 증진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그의 말대로 정말로 치료의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언론은 당사자는 이미 오래전에 뉘우치고 잊어버린 일을 억지로 들추어내서 그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기와 목적도 관계없이 단지 그가 지금은 금지약물이 된 호르몬을 복용했다는 사실만 중요하다는 듯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를 비난하는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과거에 지은 죄는 그 어떠한 것도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잘못을 뉘우치며 스테로이드 복용사실을 털어놓은 제이슨 지암비는 툭하면 사무국과 조사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한편, 선수노조와는 애매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관용을 기대할 수도 없고, 용서를 구해도 빠져나갈 곳이 없는 진퇴양난의 형국, 그것이 약물 스캔들에 휘말린 현 메이저리거들의 상황이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에게 “죄 없는 자만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한 예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어떻게든지 ‘편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데 급급한 이 시대에, 3년 전의 실수로 인해 힘들게 다시 만들어온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한 릭 엔키엘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