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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굿바이 조 토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0. 19.

[카이져의 야구스페셜]

언제까지나 뉴욕 양키스의 감독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던 조 토레가 결국은 핀스트라이프를 벗게 되었다. 1996년 양키스 감독으로 부임한 후 첫 5년 중에 4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새로운 양키스 왕조를 열었지만, 이후 7년 동안 우승에 실패했고 결국은 팀을 떠나는 입장이 되었다.


한 팀에서 12년 연속으로 팀을 지휘한 것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바비 칵스(17년)에 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토니 라루사 감독(12년)과 함께 현역 감독 중 2위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다. 사진과 함께 그의 지난 여정을 되돌아본다.


토레는 밀워키 브레이브스(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서 데뷔해 선수 생활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포수로 데뷔한 토레는 공격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1966년에는 3할(.315)-30홈런(36)-100타점(100)을 달성하며 브레이브스에서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포수로서 이와 같은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196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한 토레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수비 부담이 적은 내야수로 변신한 토레는 이때부터 3년 연속으로 100타점을 달성하며 팀 타선을 주도한다. 특히 71년에는 타격왕(.363)과 타점왕(137) 최다안타(230)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리그 MVP에 오르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선수 생활 말년의 임팩트가 조금 부족해 명예의 전당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신인왕 투표 2위, MVP 1회, 올스타전 출장 8회의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낸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었다.(통산 252홈런 1185타점 타율 .297)


조 토레는 1977년 뉴욕 메츠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메츠에서는 단 한 번도 5할 승률을 기록하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고(286승 423패 승률 .403), 82년 선수시절 자신의 친정팀인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첫해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팀의 12년 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을 일구어 내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3-0으로 무릎 꿇고 말았다.(애틀란타 통산 257승 229패 승률 .529)


84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있던 토레는 1990년 시즌 중반에 자신이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던, 그리고 8년 전 패배를 안겨주었던 카디널스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하지만 그다지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지 못한 채(카디널스 통산 351승 355패 승률 .497) 95년 중반 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다.


1996년 56살의 토레는 약속의 땅인 뉴욕 양키스의 지휘봉을 잡는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1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하며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다. 새로운 양키스 제국의 신호탄이었다.


취임 첫 해 선수단을 융화시키는 데 성공한 토레는 당장 팀을 월드시리즈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는다. 전임 벅 쇼월터 감독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냥 받아먹었을 뿐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으나, 12년이 지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이는 없다. 토레에게 샴페인 세례를 퍼붓고 있는 선수는 올해 내셔널리그 홈런왕인 프린스 필더의 아버지 세실 필더(통산 319홈런)다.


9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디비즌 시리즈에서 일격을 허용하며 잠시 주춤했던 양키스는 98년부터 3년 연속 월드시리즈 챔프 자리에 오른다. 3년 연속 우승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 3번(양키스 2번, 오클랜드 1번) 나왔을 뿐이다. 토레와 마주보고 있는 이가 이번에 구단 운영의 전권을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다.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양키스의 감독인 만큼 토레는 선수복도 많았다. 양키스에 부임한 뒤 오늘날까지 함께 호흡을 맞춰왔던 데릭 지터는 그야말로 최고의 파트너다. 1996년 토레가 취임하고 지터가 신인왕을 받았던 그때부터, 토레의 친화력과 지터의 리더십이 발휘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양키스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2년 동안 함께 달려온 또 다른 한명이 바로 마리아노 리베라다. 96년에는 팀의 핵심인 특급 셋업맨, 97년부터는 주전 마무리로 자리 잡은 리베라. 그가 거둔 443세이브는 모두 토레 감독 휘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포스트 시즌에서 76경기에 등판 0.77의 방어율로 34세이브를 거둔 리베라는 지터와 함게 토레가 가장 신임한 선수였다.


99년에는 로져 클레멘스가 우승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양키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특급 베테랑 선발인 클레멘스의 가세는 양키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는 큰 팀 공헌도로 2개의 우승 반지를 손에 넣는다. 토레가 클레멘스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는 거액을 들여 영입한 올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9살 연상이자 감독으로 1744경기를 치른 경력이 있는 돈 짐머가 양키스의 벤치 코치(한국의 수석코치와 비슷)로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토레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96시즌부터 03시즌까지 8년 동안 서로를 의지한 둘은 4번의 우승을 함께 기뻐했고, 2001년의 극적인 역전패의 현장에서도 서로를 위로해 주었다.


토레에게 뉴욕은 좋은 기억이 많은 도시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 때는 그는 브루클린을 통과하는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서기도 했다. 극심한 언론의 압박과 스타플레이어들의 기행이 끊이지 않는 뉴욕 양키스라는 팀을 이끌면서 이토록 사랑받은 감독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04년 알폰소 소리아노를 내주면서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얻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양키스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에이로드가 최고의 활약을 펼친 04시즌 포스트 시즌(11경기 3홈런 8타점 11득점)에서 양키스는 레드삭스에게 믿을 수 없는 대 역전패를 당했고, 이후 에이로드의 포스트 시즌 울렁증이 시작되면서 양키스는 3년 연속 디비즌 시리즈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올해 클리블랜드와의 디비즌 시리즈 4차전에서 패한 뒤 침울한 모습으로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조 토레. 비록 올해를 마지막으로 양키스 유니폼을 벗게 되었지만, 지난 12년 동안 그가 남긴 것은 팬들에게 쉽사리 잊히지 않을 것이다. 12시즌 동안 1942전 1173승 767패 그리고 .605의 절대적인 승률은 놀랍기만 하다.


특별한 작전 지시 없이 선수들을 믿는 스타일, 조급한 경기 운영 보다는 시즌 전체의 큰 그림을 잘 그려나가는 토레의 경기 운영 방식은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잘 발휘가 되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포스트 시즌에서의 작전 지시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이도 간혹 있었지만, 누가 뭐라 하든 그는 장차 명예의 전당에 오를 것이 확실시 되는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