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국의 대학 리그에서는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소속의 한 천재투수가 대학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빼어난 성적을 남겼다.
20경기에 등판해 15승 1패 1.69의 방어율을 기록한 그 투수는 139이닝에서 무려 202개의 삼진을 잡아내면서 내준 볼넷은 겨우 18개였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를 평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사용하는 탈삼진:볼넷 비율이 무려 10:1을 넘었고, 그가 허용한 100개의 피안타 중에 홈런은 5개에 불과했다.
유망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이트 베이스볼 아메리카(BA)가 선정한 ‘올해의 대학선수’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고, 전미 아마추어 최고의 야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 스파이크 어워드’ 역시도 그의 것이었다. 그 해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뽑혔던 이 선수의 이름은 바로 마크 프라이어다.
▷ 역대 최고의 신인
이미 고교시절부터 투타에 걸친 뛰어난 활약으로 유명세를 탔던 프라이어는 동갑내기 자쉬 베켓보다 1년 앞서 199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43픽으로 뉴욕 양키스에 지명 받은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프로가 아니라 대학행을 선택했던 프라이어는 3년이 지난 후 대학 무대를 완전히 평정하고 당당하게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것이다.(만약 양키스에 입단했다면 그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프라이어가 1순위가 아니라 2순위로 뽑힌 것에는 1픽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미네소타 트윈스가 오랜 고민을 한 결과였다. 당시 분위기는 어느 팀이 1순위가 되더라도 프라이어의 지명이 확실해 보였던 상황. 하지만 신인 드래프트 사상 최초로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000만 달러 이상의 계약이 예상되고 있었기에 스몰 마켓인 미네소타는 눈물을 머금고 프라이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미네소타가 1순위로 지명한 선수가 지금은 메이저리그의 대표 포수로 성장한 조 마우어다. 당시 마우어도 550만 달러를 받았을 정도로 기대되는 유망주였고,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미네소타의 선택이 옳았다. 참고로 프라이어는 예상대로 신인 최고액인 1050만 달러에 컵스와 사인했으며, 그의 에이전트는 다름 아닌 스캇 보라스였다.
당시 프라이어는 95~7마일(153~6km)에 달하는 패스트 볼과 ‘12 to 6’ 이라 표현되는 위력적인 커브를 가지고 있었다. ‘12 to 6’ 이라는 표현은 커브가 12시 방향에서 6시 방향으로 폭포수처럼 떨어진다는 뜻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대럴 카일 등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커브의 귀재들을 대상으로만 사용되던 것이었다.
어떤 스카우터는 프라이어를 ‘이미 완성되어 있는 메이저리그급 에이스’라고 평가했고, 혹자는 ‘그렉 매덕스와 로져 클레멘스를 합쳐 놓은 것 같다’라는 표현까지 했을 정도였다. 결국 드래프트 시기가 다가왔을 즈음 그를 향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최종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가 될 자질을 가진 선수”
90년대부터 현재까지 메이저리그를 즐겼던 팬들은 정말 축복받은 세대라 할 수 있다. 로져 클레멘스와 그렉 매덕스라는, 그 어떤 전문가에게 묻는다 하더라도 당연히 역대 탑 10에 들어갈 두 투수의 피칭을 볼 수 있었고, 그에 못지않은 위력을 선보였던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랜디 존슨, 탐 글래빈이라는 투수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수들이 뛰던 시기라 90년대 말 이후로 등장하던 신인 투수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간단했다. 당당한 체구에 우완 정통파 파워피처면 ‘제 2의 클레멘스’, 키가 큰 좌완이면 ‘제 2의 랜디’, 키 작은 파워피처라면 ‘제 2의 페드로’, 왼손 기교파면 ‘제 2의 글래빈’ 등으로 손쉽게 평가할 수 있었다. ‘제 2의 매덕스’는 거의 볼 수 없었지만, ‘제 2의 글래빈’은 수십 명이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들이 위대한 투수였기 때문.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21살의 애송이 투수가 ‘역대 최고’ 까지 운운하는 엄청난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는 스카우터들이 당시 프라이어를 평가함에 있어 ‘제 2의 클레멘스’ 라는 표현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성공적인 루키시즌
2002년이 되어 루키리그와 상,하위 싱글 A의 3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더블 A에서 뛰기 시작한 프라이어는 이미 다른 마이너리거들과는 겪이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실력으로 증명했다. 더블 A 6경기에서 35이닝 동안 55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방어율 2.57, 트리플 A에서도 3경기 16이닝에서 24개의 삼진을 잡고 실점은 단 3점(방어율 1.69).
프라이어는 이 9경기를 끝으로 2달도 채 되지 않았던 마이너리그 생활을 접고, 당당하게 빅리그에 입성한다. 그리고 2002년 5월 22일 그의 기념할만한 메이저리그 첫 번째 선발 등판 경기가 펼쳐졌다. 상대가 비교적 약체인 피츠버그였다지만, 그 경기에서 프라이어는 6이닝 동안 10개의 탈삼진을 잡으며 2실점, 자신의 첫 번째 승리를 탈삼진 쇼로 장식한다.
시카고 팬들을 비롯한 미국 전역의 야구팬들이 들끓었음은 물론이고, 메이저리그 공식 사이트인 MLB.com의 메인 화면을 이 22살의 루키가 장식해 버린다. 당시 그의 위상과 입지는 NBA 무대에 처음 등장할 당시 르브런 제임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4번째 등판이었던 시애틀 전에서는 이치로(2삼진)를 비롯한 선발타자 전원 탈삼진의 기염을 토하며 7이닝 무실점 승리를 기록하는 등, 19번의 선발 등판에서 6번의 두 자리 수 탈삼진을 기록하며 6승 6패 방어율 3.32의 빼어난 성적(116.2이닝 38볼넷 147탈삼진)으로 시즌을 마쳤다.
당시 프라이어는 8월 31일 경기를 끝으로 9월 경기에 전혀 등판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와 빅리그를 합쳐서 던진 이닝이 150이닝을 넘어서자 풀타임을 처음 맞이하는 신인 선수를 무리시키지 않겠다는 판단을 한 구단 프런트가 주루 플레이 중 가볍게 발목이 삔 프라이어를 아예 부상자 명단에 올려버리고선 시즌 아웃을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이런 현명한 판단을 내린 브루스 킴 감독 대신 ‘투수 혹사의 대명사’ 더스티 베이커가 지휘봉을 잡게 되었고, 그 때부터 컵스 투수들에게는 악몽이 시작된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악몽이.
▷ 단 1년뿐인 전성기
2003년 프라이어는 마침내 메이저리그 특급 에이스로서의 위용을 뽐내기 시작한다. 30경기에 등판해 18승 6패 방어율 2.43이라는 매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총 211.1이닝을 던져 경기당 평균 투구이닝도 7이닝이 넘었고, 245개나 되는 탈삼진을 기록했다. 다승과 탈삼진은 리그 2위, 방어율은 3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3위에 오른다.
무엇보다 그 해 후반기의 프라이어는 왜 그가 ‘역대 최고가 될 선수’ 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올스타전 이후 11경기에서 프라이어는 10승 1패 방어율 1.52를 기록하며 팬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컵스는 프라이어의 이와같은 활약에 힘입어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과도한 투구수는 문제가 있었다. 정규 시즌의 평균 투구수는 무려 113개, 메이저리그 전체 1위에 해당하는 수치였으며, 이는 처음으로 200이닝을 던진 투수에게 허락되어서는 안 될 수준의 무리한 것이었다. 그것도 포스트 시즌을 포함한 마지막 13경기에서의 투구수는 무려 121구. 사실상 이 때의 무리로 인해 프라이어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린다. 롯데의 염종석이 루키시즌이었던 1992년 이후로 빛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경기당 10구정도 더 던지는 것이 뭐가 그리도 큰 무리가 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꽤나 큰 손실을 가져온다. 정지된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가 가진 모든 탄력을 뿜어내는 것, 그것이 투구라는 동작이다. 140~160킬로의 공을 던질 때 소모되는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투구라는 한 동작에서 소모되는 단위시간당 운동량은 그 어떤 스포츠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절대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선발 투수는 100구를 던지고 나면 4일을 쉬어줘야 다음번에 정상적인 등판이 가능하다. 투구수가 많거나 휴식일이 짧아지면 그만큼 무리가 오고 선수 수명이 짧아지게 된다. ‘투수의 어께는 소모품’ 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베이커의 프라이어 기용은 적어도 메이저리그 풀타임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선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프라이어는 2003년 이후 어깨와 팔꿈치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고, 급기야 올 4월에는 어깨에 매스를 대고야 말았다. 통상적으로 치료 후 구속이 더 빨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 팔꿈치 수술과는 달리 어깨 수술은 회복도 문제지만 정상적인 구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때 NBA를 주름잡던 페니 하더웨이와 그랜트 힐이 무릎 수술 이후로 예년과 같은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처럼, 투수에게 어께 수술은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프라이어를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던 컵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프라이어는 팬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서 다시금 메이저리그 무대에 복귀하기는커녕 팀에서조차 버림 받고 앞으로의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비운의 천재투수 3인방 시리즈를 시작하고 그 1,2편인 케리 우드와 릭 엔키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주인공인 프라이어 편을 미뤄둔 것은 그가 메이저리그에 복귀할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우드와 엔키엘 편도 그들의 빅리그 복귀에 맞추어서 그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쓴 것이었고, 프라이어 편 역시도 그 때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꿈은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후 프라이어의 행방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당장 내년 시즌 시작과 동시에 정상적인 투구가 가능한지의 여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그를 받아줄 팀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FA 신분이 되었으니 투수가 필요한 팀 중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팀이 있긴 하겠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케리 우드는 이제 팀의 마무리 투수로의 도전을 앞두고 있고,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복귀한 릭 엔키엘은 약물 파동에 휘말리며 또 다시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착실하게 내년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그 두 명 이상의 평가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던 마크 프라이어, 그의 앞날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어서 빨리 그 기량을 회복해(비록 100%는 아니라 할지라도), 페니와 힐처럼 팬들에게 통한의 아쉬움으로만 기억되는 선수로 남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