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 그가 돌아온다. 복귀를 위한 시뮬레이션 피칭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페드로의 팬들은 벌써부터 흥분과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특히나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선수다. 물론 미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선수지만 한국에서 페드로를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
“현역 투수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이 미국 현지에서 행해진다면 페드로가 로져 클레멘스와 그렉 매덕스 그리고 랜디 존슨을 제치고 1위를 할 확률은 거의 없다. 단순히 인기투표를 한다고 하더라도 도미니카 출신의 흑인 페드로가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 투수라는 이점을 지니고 있는 저들을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면 두 투표 모두 페드로가 넉넉하게 1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한국의 팬들은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투수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통산 206승 92패 방어율 2.81의 뛰어난 성적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투수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일까?
▷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실력이 없이 슈퍼스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페드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의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3번의 사이영상(그 중 두 번은 만장일치), 트리플 크라운(1999년), 리그 방어율 1위 5회, 탈삼진 1위 3회, 현역 선수 중 통산 방어율 1위(2.81), 200승을 달성한 투수 가운데 역대 승률 1위(.692), 올스타전 4타자 연속 삼진 등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자이언츠, 에인절스 그리고 양키스 등에서 뛰며 통산 350홈런 1372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 칠리 데이비스에게는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1999년 양키스 선수로 은퇴 시즌을 마감하고 있던 데이비스는 9월 10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6번 타자로 나서서 2회에 솔로 홈런을 때린다. 그리고 그 홈런은 그 경기에서 양키스가 기록한 유일한 안타였다.
9이닝 1피안타 1실점 17삼진 완투승! 보스턴 선발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그날 경기 성적이었다. 120구를 던지는 동안 스트라익은 80개, 볼넷 하나 없는 완벽한 경기였다. 1회 선두타자 척 노블락의 몸에 맞는 공과 데이비스의 홈런이 아니었다면 양키스에게 사상 처음으로 퍼펙트 패배의 치욕을 안겨줄 뻔 했다. 그것도 17개의 삼진을 곁들여서.
이어서 한 달 후 레드삭스와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맞붙는다. 3차전에서 로져 클레멘스와 선발 맞대결을 한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7이닝 동안 단 2개의 안타만 허용하며 12삼진 무실점으로 팀의 13-1의 대승을 이끈다. 이 경기는 그 해 양키스가 포스트 시즌에서 당했던 유일한 패배였다.
연이은 두 번의 등판에서 자신들을 완전히 제압한 페드로를 보며 기가 질린 양키스의 조 토레 감독은 인터뷰에서, “야구는 인간들끼리 하는 경기이므로 ‘인간이 아닌 자’에게 진 경기는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고, 따라서 자신들은 전승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후 페드로의 별명은 ‘외계인’이 되었다.
몇 년 전에 한 메이저리그 사이트에서 빅리그 최고의 구질을 뽑는 설문 발표를 하며 재미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각 구질별로 1위부터 5위까지를 뽑는 이 설문에 많은 선수가 이름을 올렸지만 그 가운데 페드로의 이름은 없었다. 화려한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포심과 ‘전가의 보도’ 체인지업 그리고 무서운 위력의 커브까지도 순위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찬찬히 살펴봤더니 맨 마지막에 참조표시(#)와 함께 이러한 문구가 있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구사하는 모든 구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 판타지(fantasy) 스타
NBA의 앨런 아이버슨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단지 그의 실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80센티의 단신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게임을 지배하는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아이버슨은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키가 커야 유리한 스포츠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최고의 반열에 오른 아이버슨은 인간승리의 표상이다.
종목의 특성은 다르지만 키 큰 선수가 유리하다는 면에서 현대 야구는 농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랜디 존슨(206센티), 로져 클레멘스(193), 존 스몰츠(190), 커트 쉴링(193), 자쉬 베켓(193), 제이슨 슈미트(195), 크리스 카펜터(198), 로이 할라데이(198), 카를로스 잠브라노(195), C.C. 싸바시아(201), 브래드 페니(193), 케리 우드(195) 등 내 노라 하는 파워피처들을 보면 하나 같이 190대의 장신들이다.
비교적 키가 작은 180대 초반의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기교파 투수로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능형 투수였던 그렉 매덕스(183)는 제외하면 탐 글래빈(185), 케니 로져스(185), 제이미 모이어(183) 등은 기교파 투수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성공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심지어 지난 60년간 6피트(183) 미만의 키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투수는 양키스 소속으로 6번이나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화이티 포드(178, 236승 106패 방어율 2.75)뿐이다. 대부분의 키 작은 강속구 투수들은 파워피처로의 길을 포기하고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을 모색해야만 했고, 그 또한 성공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실정이니 공식 프로필에 키 5피트 11인치(180) 몸무게 170파운드(77kg)로 나와 있는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그 존재 자체가 신기할 수밖에 없다. 동갑내기인 ‘마무리계의 페드로’ 빌리 와그너(178)를 비롯해 뒤이어 등장한 로이 오스왈트(183)와 요한 산타나(183), 그리고 올해 데뷔한 신인 팀 린스컴(178) 등도 마찬가지로 180안팎의 키로 불같은 강속구를 구사한다.
같은 힘이라면 키가 큰 투수가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위치에너지와 원심력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온 몸의 탄력을 모두 이끌어 내는 투구 동작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투구 폼은 바람직하다 볼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들의 뒤에는 항상 ‘부상의 위험’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가냘픈 체구지만 100마일의 포심을 뿌리는 와그너에게 전문가들은 항상 투구 폼을 바꿀 것을 권유했고, 이렇다 할 부상 경력도 없는 린스컴은 단지 키가 작다는 이유 하나로 드래프트 최대어로 꼽혔음에도 불구하고 10순위까지 밀렸다. 필자도 요한 산타나가 투구 동작 이후 자세가 무너지는 약점을 하루 빨리 극복하지 못한다면 3년 내에 부상으로 신음하게 될 것으로 본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도 작은 체구 때문에 부상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토미 라소다 전 다져스 감독에게 버림받고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 된다. 물론 라소다 감독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페드로는 몸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시기가 틀렸다. 트레이드 된 이후 10년 동안 큰 부상 없이 커리어를 이어온 페드로는 이미 그 10년 동안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섰다.
‘제국’이라 불리는 양키스에게 항상 눌린 보스턴의 선수로서 그들과 싸워왔고, 실제로도 양키스의 가장 큰 위협이 된 선수 페드로 마르티네즈. 2004년 마침내 보스턴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 시리즈 전적 3: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4차전부터 내리 4연승 하며 양키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 마침내 86년 묶은 오랜 한을 푸는 데 성공한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그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실제로는 180센티도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페드로가 97마일의 강속구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고라 평가받는 각종 구질들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모습은,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판타지 스타’ 그 자체였다. 이 점이 한국의 팬들에게 가장 크게 어필했을 것이 분명하다.
▷ 부상... 부상... 부상...
조만간 페드로가 복귀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몸 상태가 좋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어깨 회전근 수술을 받고 1년 만에 복귀하는 페드로, 어깨 부상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오른쪽 종아리와 허벅다리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을 들락거렸고,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경우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작년 페드로의 투구를 본 팬들이라면 누구나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90마일에 불과했다. 물론 제대로 제구 되었을 때는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그러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1년 반 만에 찾은 펜웨이파크에서는 상대팀 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투구는 보스턴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고, 결국 옛 동료들에게 난타당하며 3이닝 동안 8실점한 후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만다.
그 경기부터 시작해 부상까지 겹친 페드로는 후반기 7경기에서 31이닝동안 무려 28실점(27자책) 방어율 7.84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뉴욕 메츠로 이적한 첫 해 다시금 2점대 방어율(2.82)을 기록하면서 다시금 페드로의 시대가 열리나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지만, 작년은 부상과 부진이 이어지며 생애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만 것이다.
페드로는 작년에 얼핏 자신은 2008년을 끝으로 은퇴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부상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할 것을 우려했음일까? 이번의 복귀에서 만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의 말은 사실로 다가올 수도 있다.
▷ 역대 최고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 필자에게 현역 투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를 뽑으라면 주저 없이 그렉 매덕스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가장 뛰어난 파워피처의 이름을 묻는다면 로져 클레멘스라고 답할 것이며, 가장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했던 투수는 랜디 존슨이라고 답할 것이다. 활동 기간이나 쌓아온 업적을 봤을 때 페드로가 이들 세 명 보다 더 위대한 투수로 기억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러한 필자조차도, 모두가 전성기라고 가정할 때 월드시리즈 7차전 선발 투수로 누구를 내세우겠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매덕스의 등판 경기에서는 상대 타자들의 무기력함이 보이고, 클레멘스의 경기에서는 우완 정통파 파워피쳐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랜디 존슨에게서는 압도적인 투구란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페드로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라운드에 나와 있는 선수들 중 가장 작은 키였던 페드로였지만, 마운드에 서 있을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큰 거인으로 보였던 선수가 바로 페드로다.
페드로가 전성기 시절 보여준 임팩트는 5년 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보여준 샌디 쿠펙스를 비롯해, 현역이면서 이미 역대 탑 10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매덕스와 클레멘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아니 99-00년도에 걸쳐 2년 동안 보여준 그의 엄청난 성적은 94-95년의 매덕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의 비교도 불허한다.
이미 그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샌디 쿠펙스가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를 역대 최고의 투수로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오히려 ESPN의 유명한 칼럼리스트 제이슨 스탁스는 그의 저서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좌완투수로 쿠펙스의 이름을 거론했다)
‘최고’ 라는 단어는 단기간의 임팩트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온 업적까지 함께 남긴 선수에게 어울리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올해 36살인 페드로 마르티네즈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있다. 45살의 클레멘스와 44살의 존슨의 예에서 보더라도 페드로가 이들처럼 못할 이유는 없다. 그는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정교한 컨트롤과 뛰어난 변화구를 지니고 있다.
‘탐 글래빈 이후로 300승 투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 페드로가 기적처럼 부활에 성공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300승을 돌파한다면 그 때는 그의 이름 앞에 ‘역대 최고’ 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200승을 달성한 페드로는 3000탈삼진(역대 14번째)에 단 두 개만을 남겨두고 있다. 덕분에 이번 페드로의 복귀 등판은 축제가 될 전망이다. 그 축제가 계속 이어져서 다시금 페드로가 인간승리의 표본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는 그 자신에게 달렸다.
라이벌 애틀란타가 마크 테익세이라를 영입하는 등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리는 동안 메츠는 페드로를 기다리며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페드로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한다면, 많은 팬들이 바라는 것처럼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두 주역인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커트 쉴링이 올해 월드시리즈에서 맞대결 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찬호로 시작된 메이저리그 열풍이 한국에 불어온 그 시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그가 계속해서 메이저리그의 ‘작은 거인’으로 남아 그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가 섞인 가운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만한 투수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