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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한국전쟁. 그리고 메이저리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25.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38선을 넘은 북한군은 우리나라를 맹렬하게 공격하며 불법 남침을 강행하였다. 6.25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형세를 낙관하고 있던 당시 정권은 국민들에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것을 알렸지만, 남은 것은 수도 서울의 함락이었다. 그것도 단 3일 만에 이루어진 참담한 결과였다.

결국 이 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참전이 결의되며, 전장이 되어버린 한반도에 많은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의 평화를 지키고자 온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이제 내년이면
한반도 전쟁 60주년이 되는 해다. 적어도 6월 6일 현충일에는 현충원에 가서 참전용사들에게 참배까지는 못 하더라도 조기(弔旗)를 개양함으로써 그 의의를 기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유치원생들의 단골 견학 장소로 독립기념관이나 현충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그 희망을 놓지 않고 싶다.

전 주월사령관이자 한국전 참전 용사이기도 한 채명신 예비역 장군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신 바 있다.

"나는 광복 후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 참전하면서 숱한 파괴와 희생의 참상, 광기·배신·음모의 그늘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사람이다. 아마도 생존한 한국군 중 내가 전쟁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전쟁과 인연 깊은 사람으로 볼지 모르지만 처참한 전쟁을 해 봤기에 단연코 이 땅에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평화주의자보다 전쟁을 혐오하고 저지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단 하루. 6월 25일 단 하루라도 좋다. 아니, 단 몇 분만이라도 좋다. 잠시 눈을 감고 우리 선배들께서 이룩해 놓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또한, 국가의 명령을 받고 이국땅 한반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벽안의 야구선수들을 소개함으로써 이들을 기리고자 한다.

▷ 파일럿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한 테드 윌리엄스

한국전의 영웅 중 야구선수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단연 테드 윌리엄스다. 윌리엄스는 한국전 참전 이전에도 2차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윌리엄스는 한국전쟁 징집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2차 대전에서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방망이를 내려놨던 윌리엄스는 꼬박 3년을 비행교관으로 복무하며 종전시까지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다시 방망이를 잡으면서 맹타를 휘두르던 그였으나, 윌리엄스는 1952년 4월 30일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친 뒤 군(軍)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해 겨울 윌리엄스는 "난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한국으로 급파된다.

1953년 2월 16일, 대위계급장을 가슴에 단 윌리엄스는 평양 남쪽의 북한군 막사와 보급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런데 정확히 목표지점을 폭파 시킨 뒤 기수를 돌리는 중에 북한군의 대공포를 맞고 추락위기에 처한다. 윌리엄스는 강한 의지로 수원공군기지까지 날아간 뒤 동체 착률을 결심한다. 기체가 활주로에 심하게 부딪혔지만 윌리엄스는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고 태연하게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1953년 6월, 39번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쉴 겨를도 없이 소속팀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세인트루이스전에 대타로 나왔다. 윌리엄스는 시즌 막판 팀에 합류했지만 37경기에서 13개의 홈런을 포함, 0.407의 타율을 기록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참전기간을 포함하여 5년여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에게 부진이란 단어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종전 후인 1957년과 58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했고, 40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1960년도에는 500홈런을 넘어서면서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참전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예비역 미군 대위 테드 윌리엄스. 그의 정복 위에 달린 훈장이 명예의 전당보다 더욱 빛나보이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가 참전하지 않았다면, 700홈런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더 커보이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 돈 뉴컴의 참전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신인왕, 사이영상, MVP를 모두 받았던 '흑인 투수' 돈 뉴컴도 한국전 참전용사다. 1949년, 팀 동료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및 인디언스의 래리 도비 등과 같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 이기도 한 뉴컴은 1952~53년까지 2년간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며 낮선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땅을 밟기 전, 뉴컴은 정말로 잘 나가는 투수였다. 1949년, 17승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이후 3년간 평균 19승(1949년 17승, 1950년 19승, 1951년 20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휴전 후 귀국하여 다시 글러브를 잡았지만, 그의 실력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특히, 1956년에는 사이영 위너로서의 위용을 발휘하며 27승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도 두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완연한 다저맨'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의 성적은 신통치 않아 '요기 베라'의 손에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내준 경험도 있다. 실제 그의 월드시리즈 통산 방어율은 8점대로 이름값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샘이었다. 이후 1958년, 브루클린에서 LA로 옮기자마자 그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다저스타디움에서 승리 없이 6패, 방어율 7.86에 그치고 만 것이다. 이에 다저스는 그를 신시네티로 이적시켰지만, 이적의 효과는 레즈에게 큰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단숨에 7승을 거두며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적 이후 3.85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근근히 선수생활을 이어가던 뉴컴은 이듬해, 신시네티와 재계약하며 13승, 3점대 방어율로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그때가 그의 마지막 힘을 냈던 시기였을 뿐, 그는 다음해 불과 6승에 그치며 인디언스를 거쳐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옛 동료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샌디 쿠팩스, 돈 드라이스데일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열 시즌동안 그는 방어율 3.56에 149승을 기록했다. 이 외에도 타격에도 큰 소질을 발휘하여 투수로써 통산 타율이 2할 7푼에 이르기도 할 만큼 샌스있는 야구쟁이였다. 이에 뉴컴은 은퇴 이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자로 다시금 활약하며, '메이저리거 일본진출 1호 선수'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어쨌든 뉴컴의 참전은 윌리엄스보다는 다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보여 준 인생과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뭇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다저스타디움에 자주 나타나 변함없는 고향팀 사랑을 이어가고 있으며, 다저스 선수들과 팬도 그를 '다저스의 아버지'로써 많이 따르고 있다.

'참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선 뭇 선수들

양키스에서 내야수로 활약하며 통산 723경기, 타율 0.263, 16홈런, 217타점을 기록한 제리 콜맨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다. 그는 야구선수보다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더 성공한 인물이기도 한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2차대전에서 57차례 출격했으며, 다시 메이저리거가 된 후 한국전에서 63차례 출격총 120차례 전투 비행의 기록을 세웠다. 2개의 공군 십자 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13개의 공군 수훈장(Air Medal) 3개의 해군 표창(Navy Citation)을 받은 그의 별명은 '캡틴(Captain)'. 즉, '콜맨 대령'이다.

한국전 참전 외에 2차 대전에도 많은 야구영웅들이 아무 대가 없이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다. 양키스의 빌 디키, 조 디마지오, 빌 리주로, 요기 베라 등도 참전용사이며, 밥 펠러, 행크 그린버그 등도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투복을 입은 사나이들이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들에게 사람들은 진심어린 경의를 표했다.

2차대전 당시, 전미 대륙에는 "독일에게 '하일 히틀러'라는 구호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플레이 볼'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참전이라는 방법으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했고, 팬들은 참전하고 돌아 온 그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340명의 메이저리거와 3000명의 마이너리거가 징집 또는 자원입대를 통해 2차대전/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그 중 35명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리고 2명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구태여 외국 선수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국가 비상사태시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선으로 스스로 달려갔다. 육탄 10용사를 비롯하여 예비역 소령 심일 선배 등이 바로 그러한 분들이다. 또한 최근에는 깨끗하게 병역의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예비역 병장 야구선수나 연예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한때 병역비리로 곤욕을 치루었던 선수들도 지금은 그 댓가를 치르고 떳떳한 모습으로 그라운드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선배들을 위해 우리 후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국가방위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는 일 외에도 제 자리에서 제 모습으로 제 구실을 다 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6월 25일 단 하루만이라도 전쟁에 대해 상기해 보며, 그 분들에 대한 감사인사와 지금도 전방에서 묵묵히 군 복무에 임하는 우리 동료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시간을 갖었으면 한다.

아울러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많은 전쟁영웅들과 벽안의 외국인 용사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