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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던 사나이, 조성옥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6.

그라운드에서는 9명의 선수들만 야구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133경기를 치러야 하는 프로야구의 특성상 9명의 선수들로만 1년을 꾸릴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들을 뒷받침해 줄 백업 요원의 존재는 ‘약방의 감초’와 같다. 특히, 좋은 백업 요원의 존재는 자칫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주전 선수들에게 강력한 ‘주사약’이 될 수 있다. 조금이라고 부진한 기색이 보일 경우 백업과 주전의 경계가 모호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우승 멤버 중 하나였던 조성옥(48) 동의대학교 감독은 프로 현역 시절, ‘주연’과는 거리가 멀었던 선수였다. 그는 프로 입문 이후 단 한 번도 전 경기를 소화한 경험이 없으며,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도 1986년의 74개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존재로 남아있었다. 팀이 대타를 필요로 할 때마다 타석에 들어섰고,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악착같이 1루 베이스로 살아나갔다. 김용철, 김용희, 김민호, 김응국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가득했던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조성옥은 팀을 이끌던 또 하나의 ‘조연배우’였다.


▷ 한국시리즈 우승을 두 번 경험한 사나이

부산 대연초, 부산 동성중, 부산고, 동아대를 나온 조성옥은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며 팀의 우승을 도왔다. 당시 불과 21세였던 조성옥은 실업팀 상업은행을 거쳐 1984년에야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홍문종, 김용철, 김용희, 유두열, 김민호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었던 조성옥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롯데의 후기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애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며, 최고의 데뷔년도를 보냈다.

이후 조성옥은 팀이 필요로 할 때마다 그라운드에 나섰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했던 조성옥은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팀에는 반드시 필요했던 숨은 MVP’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서른 하나에 맞이했던 1992 시즌에 조성옥은 자신의 최다 타점 기록(39타점)을 경신하며 팀의 가을진출을 이끌었다. 그리고 삼성 라이온스,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를 차례로 완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롯데 자이언츠는 당시 최고의 타력을 자랑했던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마저 4승 1패로 돌려세우며 팀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김응국, 김민호, 박계원 공필성 등 라인업을 수놓았던 많은 선/후배 선수들 사이에서 조성옥 역시 1992년 우승 멤버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84년에 이어 1992년 우승을 모두 경험한 조성옥은 ‘롯데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보냈던 행운아이기도 했다.

▷ 지도자로서 더욱 성공한 사나이

그러나 1992년을 마지막으로 조성옥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이듬해에 단 63경기 출전에 그쳤던 조성옥은 결국 1995 시즌, 타율 0.220을 기록하며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조성옥의 마지막 선수 생활도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현역에 몸담았던 1995 시즌에 팀이 한 번 더 한국시리즈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팀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에 우승을 내주었지만, 조성옥은 선수생활의 시작(1984년)과 끝(1995년)을 모두 한국시리즈로 경험했다. 이것도 현역 시절, 그만이 가질 수 있었던 복이기도 했다.

통산 타율 0.248, 532안타(5홈런), 211타점을 기록하며 그라운드를 떠났던 조성옥은 이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마야구의 수장이 된 그는 더 이상 ‘조연 배우’가 아니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많은 제자들이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모교인 부산고 사령탑을 맡으면서 추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백차승(샌디에고 파드리스)을 키워낸 것을 비롯하여 정근우(SK 와이번스), 장원준(롯데 자이언츠), 김태군(LG 트윈스) 등 많은 프로선수들을 배출했다. 이에 부산고는 1999, 2000년 대통령배 대회 2연패를 달성하는 등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기도 했다.

이후 조성옥은 모교를 떠나 동의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무대에서도 빼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조성옥은 올 해에도 팀을 춘계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대회 최우수 감독상까지 받았던 조성옥 감독은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다. 세계대학야구선수권 국가대표팀 코치로 내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조성옥 감독 신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바로 대회 직후 ‘간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암세포가 퍼지는 줄 모르고 그는 끝까지 그라운드에 있었던 것이다.

춘계대회 이후 조성옥 감독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간암 투병으로 갖은 고생을 다 하는 조성옥 감독을 향하여 롯데 팬들도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사령탑이 빠진 가운데서도 동의대는 대학야구 하계리그에서 A조 1위를 차지하는 등 선전을 거듭했다. 이에 남은 것은 조성옥 감독이 ‘언제 암에 걸렸냐’는 듯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와 주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조성옥 감독은 2009년 7월 4일, 새벽 6시에 마지막 숨을 내쉬며 영원히 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향년 48세. 한창 이룰 것이 많은 나이에 조성옥 감독은 그렇게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스승의 죽음 앞에 추신수는 연타석 홈런으로 추모를 대신하기도 했다.

롯데 자이언츠 조성옥. 분명 그의 현역시절 기록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롯데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멤버였으며, 고교-대학무대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낸 명장이었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제자들이 ‘제2의 조성옥’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아울러 세상을 떠난 동의대학교 야구부 조성옥 감독의 명복을 기원한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