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8일) 정오였다. 명동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러운 북소리가 들려왔다. 개그콘서트에서 하는 '남보원(남성 보장 인권 위원회)' 촬영을 야외에서 하는 듯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른바 사단법인 동물보호 시민단체가 명동 한복판을 걸으면서 내는 북소리였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는 ' 그만 먹어라. 너무 많이 먹은 것 아니냐'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무엇을 그만 먹어야 하나 라는 궁금증이 생긴 것도 잠시, 그들의 슬로건 바로 밑에는 '개 식용 반대 캠페인' 이라는, 매우 친절한 문구까지 씌여 있었다.
매우 맞는 말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은 생명인데, 일개의 개체(구체적으로는 사람)가 다른 개체를 무자비하게 잡아먹는다는 것은 분명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육식 동물도 먹이 사슬을 유지시키는 범위 내에서 동물들을 사냥하며, 배가 고프지 않는 이상 초식 동물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자연(自然)이라는 한자 풀이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란 이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개 식용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동물 보호 단체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그럴 듯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100% 옳은 소리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민 단체와 NGO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정부를 압력하는 것(그래서 '압력 단체')처럼, 그들의 주장 역시 모순된 면이 많아 상당히 아쉽기만 하다.
동물 보호 단체가 단골로 등장시키는 주체인 '개'. 이들은 캠페인을 통하여 '개'를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 개를 살상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개'만 불쌍하다고 느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소나 돼지를 도축하여 고기로 만드는 과정 또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섬뜩'한 점이 많다. 특히, '소'는 자신이 죽는 순간을 알고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소'나 '돼지'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동물 단체의 '개 사랑'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밝힐까. 아마 '우리도 좀 관심 가져 달라'고 호소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하여 수능시험에도 비슷한 지문이 출제된 바 있다. 바로 이규보의 '슬견설(蝨犬說)'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떤 손(客)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엔 아주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손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는 미물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는 필연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대들었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놈과 작은 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支節)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 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道)를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 친구들이 단 한 번이라도 이규보의 '슬견설'을 읽어 보았을까 의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왜 유독 '개'만 먹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인지 말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제 사회 '체면'과도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인데, 발단은 1988년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눈이 우리를 주목했던 바로 그때, '개'를 식용으로 쓴다는 사실이 서양 사람들 눈에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시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 사람들이 개를 먹는다고요? 와우~! 한국인들은 모두 야만인입네다."
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을까. 이때부터 유독 동물 보호 단체들이 '보신탕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도 '잊을 만 하면' 개를 먹지 말자는 피켓을 들고(어쩔 때에는 애완용 강아지를 들고 와서) 도심지를 활보하고 다닌다. 그리고 성금을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기부금을 받기도 한다.
'개'를 식용으로 사용했었던 것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농경 사화에서 '소'는 중요한 생산 수단이었고, 그랬기에 감히 '소'를 고기로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개'가 중요한 육고기의 중요한 섭취원이 되었다고 한다(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 저서 참조). 국내에서는 신라 시대에서부터 조선 시대까지 '개'가 육고기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잡아 왔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농경사회에서 이러한 식습관이 전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 이기도 했다. 실제로 위에 제시된 이규보의 슬견설에서도 '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즉, '개'를 육고기로 삼았던 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며, 오히려 서양 농경사회에서도 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개고기를 먹기 때문에 야만인'이라는 명제는 100% 틀린 이야기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개'를 먹는 것이 '금기시 되어 온 것처럼' 얘기가 되었을까.
이는 '애완동물'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서양이나 우리나라에서 주요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는 것이 바로 '강아지'가 아니었던가. 눈망울이 예쁜 강아지를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냐는 논리가 1988년 올림픽 이후로 퍼지면서 '개 먹지 말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 역시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육고기의 섭취 수단이었고, 이는 곧 '소'나 '돼지'를 육고기로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농경사회에서 '소'를 잡는 것이 더 큰 금기사항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필자도 개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만 먹지 말자고 일년 내내 떠드는 동물단체에는 쓴소리를 날리고 싶다.
"개를 먹지 말자고요? 그럼 소나 돼지도 먹지 말아야겠네요? 친구를 잡아먹지 말자고요? 그럼 '개'만 인류의 친구고, 소나 돼지, 닭은 인류의 친구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런 걸로 성금 받아먹을 바에야 차라리 야생 동물 보호 운동을 벌이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그리고 이규보의 슬견설에 나오는 마지막 말을 아울러 남기고 싶다.
"당신네들은 물러가서 눈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道)를 이야기하겠습니다."
// 글, 사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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