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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고독한 백차승!! 희망을 던져라~!!

by 카이져 김홍석 2008. 1. 31.
박찬호의 메이져리그 진출과 성공 이후 많은 선수들이 메이져리그의 문을 두드렸다. 당장 생각나는 선수만 해도 김병현, 서재응, 서재환, 조진호, 권윤민, 최희섭, 이승학, 류제국, 추신수 등 꽤나 많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대한 꿈을 안고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박찬호 이후로 팀의 주전 선수로서 확실히 활약을 한 선수는 김병현과 서재응 단 둘 뿐이었다. 나머지 선수들은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다 한계를 느끼곤 국내에 복귀했다. 특히 지난해 최희섭에 이어 얼마 전 서재응까지 복귀를 선언하며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던 선수들 중 대부분이 국내로 돌아온 상황이다.


이제 한국의 메이져리그 팬들이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유일한 풀타임 메이저리거인 김병현이 제자리를 찾고, 부활을 꿈꾸는 박찬호가 선전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메이져리그에 진출한 많은 선수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선수는 누굴까? 전문가들과 매니아들에게 박찬호 이후 팀의 에이스급으로 성장하며 거물급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가 있다.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선발 한 자리를 노리고 있는 백차승이다.


백차승과 송승준 그리고 봉중근, 이들 세 명은 모두 80년생 동갑내기들이다. 봉중근은 신일고, 백차승은 부산고, 송승준은 경남고 출신이며, 송승준의 고교 1년 선배인 덕에 운 좋게도 고교시절 이들의 경기를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당시 고교야구는 신일고의 천하였다. 경남고와 서울고 휘문고 등이 4강권을 형성하며 신일고의 대권에 도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중심에는 봉중근이 있었다. 2학년이던 97년 4대 고교야구 대회(대통령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청룡기) 중 대통령배를 제외한 3개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 투수상을 독식, 신일고의 역대 최전성기를 만들어 냈다.


이후 벌어진 세계 야구선수권에서는 투수로서만이 아니라 타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4경기 연속 홈런과 4할이 넘는 타율로 대회 MVP를 수상. 이를 계기로 고교를 중퇴하고서 90만 불의 계약금을 받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했다.


경남고의 송승준도 화려한 고교시절을 보냈다. 97년에는 매번 4강에서 봉중근의 신일고에 패배하며 ‘신일고 천하’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어야 했지만(대신 부산권 대회인 화랑대기에서 우승했다), 봉중근이 떠난 후 3학년이던 98년도에 청룡기와 봉황대기에서 우승하며 경남고 천하를 선포했다. 비록 대통령배에서 한수 아래로 평가받던 경남상고에게 패배하며 신일고와 같은 3관왕은 실패했지만 확실히 그해 최고 선수로 성장하며 졸업과 동시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참고로 이때 봉황대기에서 경남고를 꺾고, 화랑기 결승에서 부산고를 꺾었던 경남상고의 에이스 김사율은 3명이 모두 떠난 뒤 고졸 최대어로 평가받으며 2억이 넘는 계약금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으나,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에 비해 백차승은 고교시절 내세울 것이 그다지 없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야구 명문인 부산고에서 입학과 동시에 에이스에 4번 타자였던 괴물. 중학교 3학년 때 140km의 공을 뿌리며 이미 부산 고교 야구계에서는 유명했던 스타였던 백차승이었으나 당시 부산고의 전력은 형편없었고 내세울 것이라곤 기껏해야 1학년이던 96년 봉황대기에서 우수투수에 선정된 것 밖에 없다.


지역 최고의 라이벌 팀답게 부산고와 경남고가 시합을 하면 양교는 모두 수업을 뒤로한 채 구덕운동장으로 달려가 응원전을 펼쳤고, 백차승이 입학한 96년 이후 그 라이벌 경기에서 부산고등학교의 선발투수 겸 4번 타자는 항상 백차승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남고는 송승준을 축으로 한 투수력뿐만 아니라 타력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수준, 아무리 백차승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혼자만의 원맨팀으로 상대할 전력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던질 투수가 없어서 7실점을 하고도 완투패를 해야만 했던 백차승을 보면서 모교가 승리했다는 기쁨을 넘어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고교시절을 보냈지만 백차승은 스카우터들 사이에서 점점 유명해져갔다. 140km 안팎이던 봉중근과 최고 구속 147km 의 송승준에 비해, 당당한 체구로 최고 152km의 엄청난 강속구를 구사했던 백차승은 은연중에 그들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 둘 보다 더 많은 125만 불의 계약금을 받고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가서도 그의 불운은 계속 되었다. 송승준이 보스턴 산하 싱글 A팀에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고, 마이너 리그의 올스타격인 퓨쳐스 게임의 대표로 선발되는 등, 한때 팀 내 유망주 랭킹 1위까지 오르는 동안에도, 그리고 봉중근이 ‘제2의 글래빈’ 이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메이저리그에 콜-업 되어 활약하는  동안에도 백차승의 소식은 들려오질 않았다.


01시즌과 02시즌을 부상으로 인해 통째로 날려버린 그는 다른 두 명에 비해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린 그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냈다. 2006년 팀내 ‘트리플 A 최우수 투수’로 뽑혔던 백차승은 지난해 선발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쳤고, 무한 경쟁에 돌입한 상황이지만 올시즌 풀타임 선발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보스턴의 마쓰자카 역시 80년생이다. 그 때문에 고교 졸업 당시 메이저리그 팀들의 표적이 되고 있던 둘은 자연스레 스카우터들에게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 당시의 평가는 포텐셜(잠재력)만큼은 분명 백차승이 위라는 것이었다. 백차승이 선발진에 합류할 수만 있다면, 두 선수의 맞대결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백차승은 어느새 이들과는 가야할 방향도 달라졌고 입장도 달라져버렸다. 99년 출국 후, 단 한번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기에 병무청의 병역법 위반자로 명시되기도 했었고, 이후 2005년 미국 시민권자와의 결혼 후 한국 국적을 포기하며 공식적으로는 ‘미국인’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고, 많은 의혹과 함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에 들어오지 않겠다며 미친 듯이 훈련에 열중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국내로의 복귀도 시도할 수 없는 그는 이제 메이저리거로서 성공할 수밖에 없다. 동갑내기 투수들 중 가장 높은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던 그가 이제는 홀로 남은 메이저리그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영원히 그의 뒤를 따라다닐 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의 선택의 결과이기에 어쩔 수 없는 문제이고, 당연히 감당해야 할 대가이기도 하다. 이제 백차승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 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멋진 성적으로 보답하는 것뿐이다. 식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 그것 밖에 남아있지 않다.


아직도 원문 기사들을 보면 백차승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Cha Seung Baek, of Korea' 라고 표기를 한다. 국적 같은 추상적인 개념과는 별도로 그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가 한국의 팬들에게 존경받는 선수로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멋진 성적을 거두며 메이저리거로서 성공하는 것, 그것만이 백차승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길을 걷는 백차승. 지금의 이러한 모습조차도 왠지 어울려 보이는 것은 고교시절부터 너무나 불운했었던 그의 모습이 옛 추억으로 아련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