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류현진의 연속 퀄리티 스타트(QS) 기록이 깨지고 말았네요. 그것도 ‘기록 중단 전문가’ 강귀태에게서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야구에서 징크스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류현진은 한편으론 시원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지켜보는 팬의 입장에서는 무척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귀태의 공이 아주 살짝 펜스를 넘기는 그 순간 느껴지는 끝을 알 수 없는 허무함이란…
1회 넥센이 3점을 내는 과정도 참 요상했습니다. 그 평범한 플라이 타구가 조명 속으로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상훈의 잘못은 절대로 아니죠. 단지 ‘야구 문외한’들이 설계하고 만든 야구장에서 시합을 해야 하는 한국 프로야구의 열악한 시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야구장의 조명은 직사각형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한 줄로 구장 전체를 두르면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구가 조명 속에 사라지는 일이 없지요.
하지만 역시 류현진은 류현진이더군요. 2회부터 6회까지의 피칭은 거의 완벽했습니다. 초반에는 좋지 않던 몸이 공을 던지면 던질수록 풀리더군요. 그렇게 6회까지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류현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이스의 피칭’이죠.
개인적으로는 원래부터 QS라는 것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지 않는 편입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누누이 강조했지만, 올 시즌의 류현진이 대단한 것은 ‘연속으로 QS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꼴찌 팀에서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 1점대 방어율로 다승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26일 경기에서 보여준 류현진의 피칭은 확실히 에이스다웠습니다.
아무리 에이스급 투수라 하더라도 경기 초반에 흔들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를 어떻게 막아내느냐가 정말 중요하죠. 전 지금부터 정확히 10년 전, 메이저리그의 한 투수가 1회에 5실점 한 후 남은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9이닝 5실점 완투승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칭이야 ‘에이스가 보여줘야 할 피칭’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류현진이 바로 그랬습니다. 2회부터 보여준 그 듬직한 피칭이 있었기에 한화 타자들이 모처럼 활발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역전에 성공하여 류현진의 승리를 도와준 것이지요. 전 자기만 잘 던진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투수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타자에게 신뢰를 얻어서, 그들의 자발적인 파이팅을 이끌어내는 투수야 말로 진정 좋은 투수지요. 야구에는 분명 그런 선수들이 있습니다. 같은 방어율과 이닝을 기록하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승리를 챙기는 그런 투수가 말이지요. 물론 류현진도 그러한 투수 중 한 명입니다.
8이닝 3실점을 기록했다고 해도, 그 2점이 팀이 1점 낸 바로 다음 이닝에서 1실점, 또 팀이 1점을 내자 그 직후에 1실점,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8이닝 3실점의 피칭이라면 그 피칭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요? 그런 것보다는 류현진처럼 초반에 무너졌지만, 이후를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타자들에게 ‘역전할 수 있다’는 희망과 신뢰를 안겨주는 피칭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피칭’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이기는 피칭’이지요.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호흡이죠. 투수를 살리는 것은 타자의 역할이고, 타자를 살리는 것은 투수의 역할입니다. 그런 야구를 할 수 있는 팀이 바로 ‘강팀’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전 QS처럼 틀에 박힌 기록보다는, 어제 류현진의 피칭이 더욱 값졌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다승이라는 지표를 방어율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그나저나, 한대화 감독에 대해선 역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결국 가장 추한 모습으로 류현진의 기록이 중단되고 말았으니까요. 8일 롯데전에 등판한 이후 9일 만인 17일 LG전에서 등판, 그리고 또 9일 만인 26일 넥센전에서의 등판. 사실 LG전의 류현진도 100%라고 보긴 어려웠죠. 해설자가 계속해서 “정상 컨디션이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했을 정도로 말이지요. 등판일정을 그런 식으로 가져가면, 투수가 컨디션 조절하기가 어렵다는 건 일반 야구팬도 아는데, 감독이 왜…?
야구에서의 기록은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기어이 달성하거나, 아니면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깨어 버릴 때 그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법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메이저리그에 있었죠. 각각 테드 윌리엄스와 그렉 매덕스가 주인공입니다.
테드 윌리엄스의 ‘마지막 4할 신화’는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시즌 최종전인 더블 헤더를 앞두고, 반올림 4할(.3996)을 기록하고 있던 윌리엄스는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기출장을 감행했죠. 그리고 2경기에 모두 나와서 8타수 6안타를 때려내며 .406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자신이 ‘당당한 기록’을 만들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의지를 실력으로 증명하며 만들어낸 대기록이었죠. 이 기록 앞에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기록 따윈 중요치 않다. 팀이 우선’이라는 교훈을 몸소 보여준 양반이 바로 그렉 매덕스였습니다. 연속 이닝 무볼넷 신기록을 이어가던 매덕스는 감독이 고의4구를 지시하자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태연하게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기록을 중단시킨 것이지요. 그걸 지시하는 감독(바비 콕스)이나,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매덕스나 정말 기가 막힌 사람들 아닙니까?.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입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14년 연속 15승-200이닝’을 동시에 기록했던 매덕스는 2002시즌의 마지막 등판을 앞두고 이미 15승을 달성한 상태였습니다. 200이닝에는 5.2이닝만 남겨두고 있었죠. 하지만 팀의 포스트시즌 1차전에 등판할 예정이었던 매덕스는 그 시합에서 53개의 공만 던져 5이닝을 1실점으로 막은 후 미련 없이 마운드를 내려옵니다. 무려 15년을 이어온 사상 초유의 대기록 달성에 아웃 카운트 2개만 남겨두고 있던 상황에서 ‘난 그런 거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지요.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전 들고 있던 리모컨을 던져서 박살낸 기억이 있습니다. 교체를 지시한 감독(이번에도 콕스)과 그걸 거부하지 않은 매덕스가 순간적으로 너무 미웠기 때문입니다.
윌리엄스는 4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치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끄럽지 않은 기록’으로 당당히 만들어 냈고, 매덕스는 기록 앞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의 의지로 그것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팀을 위해서였죠.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이번의 경우처럼 ‘기록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연했는데도, 그것이 깨진 경우’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선수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감독의 결정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라면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지요. 아쉽게도 류현진의 놀라운 대기록은 가장 추한 형태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두산전을 피하지 않고 등판해서 깨졌다면, 2차적인 비난은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류현진을 지켜본 한대화 감독이 류현진의 실력을 100% 믿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이러니하네요. 등판일정까지 들쭉날쭉하게 조정하면서 연속 QS기록과 20승에 연연해 할 거였다면, 어떻게든 그 기록은 이어졌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의미와 성과가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것은 한대화 감독이 만만하다고 봤던 넥센에 의해 깨졌고, 쓸데 없이 안티들만 양산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뭔가요…?
차라리 기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였다면, 6회가 끝난 후 류현진을 교체했어야죠. 하지만 어정쩡하게, 이것도 얻고 싶고 저것도 챙기고 싶었던 한대화 감독은 여러 가지를 모두 손에 넣으려다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팬들의 신뢰도 잃어버렸지요. 팬들의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실망은 기록 중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대화 감독의 류현진에 대한 기용 방식을 향하고 있지요.
아직 류현진의 20승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계산해보니 현재 잡혀 있는 마지막 일정인 9월 19일 경기까지 포함해 정상적인 로테이션으로도 앞으로 4번의 등판이 가능하더군요. 그 4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면 20승이 가능합니다. ‘타고투저’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 올 시즌에 1점대 방어율로 20승을 달성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역대 투수 최고 시즌’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상대팀은 삼성-KIA-LG-롯데가 될 것으로 보이네요. 하필이면 마지막 상대가 롯데라니, 이것도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경기에서 류현진이 롯데를 상대로 완벽한 피칭을 보여주며 20승을 달성한다면, 향후 MVP 투표도 좀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록은 아쉽게 깨졌습니다. 하지만 류현진은 류현진입니다. 그깟 별 공신력도 없는 QS라는 기록으로는 감히 그 실력과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대단한 투수라는 말입니다!!
// 카이져 김홍석[사진제공=한화 이글스, 기록제공=Statiz.co.kr]
추천 한 방(손가락 모양)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로그인 없이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