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국의 가을야구에 심취해 있는 동안 미국에서도 메이저리그의 포스트시즌(PS)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7일)이 바로 그 첫날인데요. 첫날부터 정말 화려한 볼거리가 있었네요. 현역 최고의 투수라고 할 수 있는 로이 할러데이(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자신의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노히트노런의 쇼’를 펼쳤습니다.
신시네티 레즈와의 디비즌 시리즈(DS) 1차전 홈경기에 선발 등판한 할러데이는 5회에 상대 6번 타자 제이 브루스를 볼넷으로 내보낸 것을 제외하면 단 하나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습니다. 9이닝 ‘0’피안타 1볼넷 8탈삼진의 노히트노런 완봉승!(하이라이트 영상 링크)
8개의 삼진을 잡아낸 투수의 투구수가 104개에 불과하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중 무려 79개가 스트라이크라는 것은 할러데이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할러데이의 대활약으로 1차전을 4-0으로 승리하며 3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을 위한 첫 스타트를 순조롭게 끊었습니다.
할러데이의 PS 노히트노런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포스트시즌 역사상 두 번째로 나온 대기록이라죠. 첫 번째는 1956년 뉴욕 양키스의 투수 돈 라센이 월드시리즈에서 기록한 ‘퍼펙트 게임’입니다. 무려 54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의 타선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투수가 나온 것이죠. 게다가 신시네티는 올 시즌 내셔널리그(NL) 팀 득점 1위를 기록한 막강 타선의 팀입니다.
할러데이는 지난 십 수년간 메이저리그에 푹~ 빠져서 살아온 제가 은퇴한 그렉 매덕스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투수입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기쁘네요. 작년까지 토론토 블루제이스 소속이었던 할러데이는 ‘양키스 킬러’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소속팀이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벽에 부딪혀 단 한 번도 PS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지요. 그랬던 그가 자신의 첫 PS 등판에서 대형사고를 친 겁니다. 역시 물건은 물건이란 것을 확실하게 증명했습니다.
사실 할러데이는 노히트노런과 관련된 뼈아픈 추억이 한 가지 있죠. 할러데이는 1998년에 데뷔했고, 그해 딱 2경기에 등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2번째 등판에서 이제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애송이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9회 2아웃까지 노히트로 제압하는 놀라운 피칭을 보여주었었죠. 최후의 순간에 대타로 나온 바비 히긴슨에게 홈런을 허용하고 노히트와 완봉승이 모두 날아가긴 했지만,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마지막 한 타자를 더 상대해 자신의 첫 완투승을 거둔 기억이 있습니다.(히긴슨은 당시 디트로이트의 간판 타자로 마침 그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지 않고 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데뷔부터 노히트와 관련된 내용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이니, 첫 PS 등판이라는 중압감 따위를 느낄 리가 없지요. 게다가 그는 이미 33세(77년생)의 베테랑으로, 포스트시즌 경험이 없을 뿐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우완투수이니까요. 신인시절 그를 괴롭히던 ‘스티브 블레스 증후군’을 단 1년 만에 멋지게 극복하고 리그 최고의 에이스로 발돋움한 그에게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이겠죠.(참조)
할러데이에게 올 시즌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듯 합니다. 지난 겨울의 대형 3각 트레이드를 통해 정들었던 토론토를 떠나 필라델피아로 옮겼을 때부터 그의 화려한 올 시즌은 이미 예고가 된 상황이었죠. 아메리칸리그(AL)에서 NL로의 이적, 그것도 리그 최고의 격전지구인 AL 동부지구에서 뛰면서도 2점대 방어율을 밥 먹듯이 기록한 리그 최고의 에이스였으니, 드디어 좀 더 쉬운 상대들을 만나게 된 할러데이의 올 시즌을 기대한 팬들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할러데이는 올해 자신의 최고 기록인 2.44의 좋은 방어율로 21승(10패)을 거두며 개인 통산 3번째 20승을 달성했습니다. 33경기에서 무려 250.2이닝(평균7.6이닝)을 소화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이닝소화능력을 과시했고, 9번의 완투와 4번의 완봉은 모두 올 시즌 ML 최다 기록입니다. 그 4번의 완봉승 중 한 번은 5월 29일 플로리다 말린스를 상대로 기록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20번째 ‘퍼펙트게임’이었습니다.
NL 다승 부문 단독 1위, 방어율 3위, 탈삼진 2위, 투구이닝 1위를 기록한 할러데이는 올 시즌 NL 사이영상 수상이 유력한 상황입니다. 수상하게 된다면 지난 2003년(22승 7패 방어율 3.25) 이후 7년 만의 개인 통산 2번째 수상이 될 전망이며, AL와 NL에서 모두 사이영상을 거머쥔 역사상 5번째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퍼펙트 게임과 사이영상, 거기에 PS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까지 세운 할러데이에게 남은 소망은 이제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뿐입니다. 소속팀 필라델피아는 후반기 들어 엄청난 상승세를 타며, 결국 올 시즌 ML 전체 승률 1위로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성공했습니다. 이미 지난 2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1번의 우승을 경험한 적 있고, 이번엔 3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과 더불어 또 한 번의 우승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망도 매우 밝은 편이지요. 후반기 들어 트레이드를 통해 또 한 명의 ‘로이’를 얻어온 필라델피아는 로이 할러데이–로이 오스왈트(13승 13패 2.76)–콜 하멜스(12승 11패 3.06)로 이어지는 완벽에 가까운 선발 삼각편대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을 바탕으로 후반기에 50승 25패의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요.
타력에서는 라이언 하워드(31홈런 108타점 .276)와 채이스 어틀리(16홈런 65타점 .275) 등이 중간중간 부상으로 빠지면서 예년만큼의 화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반기에는 NL 최다득점을 기록하며 투수들을 도왔죠. 쉽게 말해 NL 최고의 투수력과 타력이 공존하는 팀이 바로 필라델피아란 뜻입니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전망은 밝습니다. 현재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8개 팀 가운데 선발 싸움에서 필라델피아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팀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작년에 패배를 안겨준 뉴욕 양키스를 또 다시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이제 이 팀에는 현존 최강의 양키스 킬러인 할러데이가 있습니다.
참고로, 할러데이는 통산 양키스전에 36번 선발 등판해 약 250이닝 가량을 소화하며 18승 7패 7완투 3완봉 방어율 2.98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양키스 타선이 보여준 위력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수치죠. 할러데이의 NL 이적에 양키스 팬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는 후문입니다.
한국의 MLB 팬들로부터 ‘할라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할러데이, 올 시즌은 반드시 그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의 감격을 누린 후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현존 최고의 완투형 선발투수’임에 분명하고, 또한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고 믿는 투수입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할러데이의 월드시리즈 MVP 수상을 기대해 봅니다~!!(^^)
// 카이져 김홍석[사진=MLB.com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