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계 원로인 김응룡(69) 전 삼성 라이온즈 사장은, ‘사장님’이라는 호칭보다는 ‘감독님’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정겹고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은 채 사무실에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보다는, 야구 유니폼을 입고 덕아웃에서 선수들을 호령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코끼리 감독’의 이미지가 야구팬들의 뇌리가 더 강하게 박혀있다.
김응룡 전 사장은 최근 지난 3일 단행된 삼성 그룹 사장단 인사에 따라 사장직에서 물러나 명예직인 고문으로 남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에 처음에는 다소 허탈감을 내비치기도 했던 김응룡 감독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조용히 주변을 정리했다. 선수와 감독을 거쳐 구단 사장까지, 사실상 50년 만에 성인야구 일선 현장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 셈이지만, 김응룡 전 사장은 특유의 호탕한 성격답게 미련 없이 모든 짐을 훌훌 털고 한 명의 순수한 ‘야구인’으로 돌아왔다.
사실 한국야구계에서 김응룡만큼 성공한 야구인도 드물다. 북한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부산상고와 실업야구 한일은행을 거친 김응룡은 73년부터 친정팀인 한일은행의 사령탑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하며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김응룡 감독은, 부임 첫해에 팀을 일약 우승으로 이끈 것을 비롯하여 1986년부터 전무후무한 4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고, 90년대까지 총 9차례에 걸친 한국시리즈에서 전승을 거두는 신화를 창조하며 ‘타이거즈 왕조’의 신화를 만들었다.
2001년 삼성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이듬해에는 삼성의 오랜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고 생애 열 번째 우승을 완성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이끄는 LG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후 “야구의 신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는 명언을 남겨 이후 김성근 감독에게 ‘야신’이라는 별명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하여 “내가 야구의 신이라면, 야신을 이긴 자기는 대체 뭐라는 말인가?”라고 응수하며 김응룡 감독의 속내를 꿰뚫기도 했다.
‘우승 청부사’ 김응룡의 지도력은 국가대표 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7년 처음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그해 11월 대륙간컵대회에서 한국야구의 세계 첫 정상을 이끌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드림팀’을 이끌며 올림픽 사상 첫 동메달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특히 한국보다 한 수 위로 평가되었던 일본을 상대로 A매치 첫 승리를 비롯하여 유난히 강한 모습을 드러내며 한국야구의 근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응룡 감독은 흔히 선수 복 많은 지도자로 꼽힌다. 해태와 삼성 시절, 그의 곁에는 항상 최고의 선수들이 끊이지 않았다. 선동열, 조계현, 한대화, 이순철, 김성한, 이종범, 양준혁, 이승엽, 임창용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운 한국야구의 전설적 스타들이 모두 그의 품을 거쳐 갔다.
하지만 좋은 선수들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항상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개인이 아닌 팀으로서의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끈 힘은 김응룡 감독의 리더십에 있다.
김응룡 감독하면 흔히 카리스마 넘치는 강성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덕아웃에서 의자를 집어 던져 선수단의 분위기를 다잡는다거나, 승리를 눈앞에 둔 투수를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놓고 강판시키는 비정함, 심지어 자신의 지시에 불복하는 선수에게 외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발차기를 선물했다는 식의 전설적인 무용담(?) 등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하지만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만이 김응룡식 리더십의 전부는 아니다. 해태 시절 그와 함께했던 선수들은 김응룡 감독을 가리켜 ‘코끼리를 가장한 꾀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의도적인 제스쳐나 연출된 상황을 통하여 팀 분위기를 다잡고 선수들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는 용인술에 능했다는 평가다.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두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코칭스태프나 베테랑 선수들의 역할을 존중하며 선수단을 장악하고 경기를 풀어나가는데 그들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타 선수들을 다루는 방법도 ‘규율속의 자율’로 정의 내려진다. 선수들을 엄하게 다루는 것 같아도 재능이 있고 개성이 뚜렷한 선수들에게는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믿음의 야구’를 펼쳤다. 이종범은 90년대 해태시절, 김응룡 감독 밑에서 5툴 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뽐냈다. 양준혁은 한때 야구계에서 퇴출될 뻔 했던 위기를 극복하고 김응룡 감독의 부름을 받아 삼성의 프랜차이즈스타로 장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김응룡 감독을 은사이자 인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존경을 표시한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좋은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사 직설적이고 호불호가 분명한 그의 성격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해태 시절, 그에게 실제로 구타를 당했다고 전해지는 선수들이 적지 않고, 삼성으로 옮겨와서도 몇몇 선수들에게 인신공격적인 폭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킨 경우가 꽤 있었다. 김응룡 감독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 기자는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끝까지 함께 간다고 할 만큼 확실한 의리파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을 홀대하는 일면도 있다.”고 평가한다.
김응룡 감독은 2005년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야구인으로서는 최초로 구단 사장에 취임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현역시절 프런트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했을 만큼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김 감독이지만, 사장으로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이후로는 현장의 권한을 존중하며 무리하게 앞으로 나서지 않고 프런트와의 본분에 충실한 모습을 통해 역할분담의 모범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뒤를 이어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애제자’ 선동열 감독에 대한 배려와 후원이기도 했다. 그것이 삼성이 김응룡 감독 퇴진 이후에도 두 번의 우승을 더 추가하며 2000년대를 대표하는 강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공식적으로는 41년생이지만, 실제로는 39년생, 어느덧 칠순을 훌쩍 넘긴 노장은 50여년에 걸친 현장 생활을 정리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비록 감독이나 사장 같은 명찰은 내려놓았지만, 야구인으로서의 인생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후배들에게 이제껏 쌓아온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야구 원로로서 한국야구 발전을 위하여 앞장서야 할 책임감이 남아있다. 한국야구 역사의 한가운데서 오랜 세월 영욕을 함께해왔던 영원한 ‘코끼리 감독’의 멋진 새 출발을 기대한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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