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 김재현, 구대성, 안경현, 가득염... 등 올 시즌 프로야구에는 유난히 전설들의 은퇴소식이 많았다. 특히 양준혁의 전격적인 은퇴 소식은 많은 팬들에게 남다른 감회를 자아냈다. 그와 더불어 한편으로 팬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럼 이종범은?” 하는 의문부호였다.
프로 입단 동기생으로, 나란히 동시대를 풍미한 영호남의 라이벌로, 나이가 들어서도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장수한 두 스타의 존재감은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양준혁은 삼성과 오랜 애증관계를 유지해왔다. 한때 선수협 설립파문을 놓고 구단으로부터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하기도 했고, 다시 돌아와서는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합작하기도 하며 희노애락의 역사를 공유했다. 아픈 순간도 많았지만 결국 떠나는 자리에서 양준혁은 삼성으로부터 가정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종범도 그랬다. 트레이드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이종범도 몇 차례 타이거즈에 배신감을 느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해태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주도했고 심지어 해외진출 당시에도 구단의 처우에 따르며 막대한 이적료까지 벌어준 이종범이었지만, 전성기가 지난 선수말년에는 노쇠화를 이유로 구단으로부터 은퇴까지 종용당하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 이종범은 “한때 다른 팀으로의 이적까지 고민할 만큼 힘겨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선수생활에 대한 본인의 강력한 의지와 팬들의 지지에 힘입어 백의종군한 이종범은 최고참으로 2009년 KIA의 우승에 공헌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구단과의 그간의 앙금을 풀고 영원한 프랜차이즈스타로서 남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올해 KIA가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실패하며 부진을 겪자 팀 개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데다, 때마침 입단 동기인 양준혁의 은퇴소식까지 들려오며 덩달아 팬들이 이종범의 거취에 대해서까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또다시 2~3년 전과 같은 파문이 재현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종범은 세간의 소문을 뒤로 한 채 다시 한 번 ‘마이 웨이’를 선언했다. 내년에도 변함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KIA 구단도 비교적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며 이종범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종범이 선수로 뛰기는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절대로 이종범을 강제로 은퇴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팬들의 환호가 이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제 그만큼 어깨도 무거워졌다. 양준혁과 구대성의 연이은 은퇴가 남긴 또 하나의 여운은, 곧바로 국내 야구계에서 더 이상 현역으로는 이종범이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프로야구 ‘현역 최고령’이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이 이종범의 앞에 달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준혁은 평소 자신의 선수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경쟁자는 ‘나이와의 싸움’이었다는 말을 즐겨했다. 노장이라는 타이틀, 나이 많음에 대한 편견은 끊임없이 양준혁을 괴롭혔다. 특히 최고령이라는 수식어를 단 이후에 느낀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송)진우 형이 있을 때는 그래도 좀 나았다. 내 앞에 바라보고 따라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진우형이 은퇴를 발표하고 나자 솔직히 외롭더라. 그 부담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최고령 선수라는 타이틀에 대한 양준혁의 솔직한 속내였다.
이종범 역시 양준혁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실 이종범의 현역 연장 선언을 두고 엇갈린 반응도 있었다. “2009년에 우승을 했을 때 명예롭게 은퇴할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선수로서 이미 이룰 것은 다 이뤘는데 이제 후배들에게 앞길을 열어줄 때도 되지 않았냐?”는 등의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 역시도 어쩌면 이종범의 명예를 걱정하기에 가능한 지적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종범의 입장은 확고하다. 돈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다. 그저 아직은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좀 더 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자 생각이다.
이종범의 가치는 보이는 성적으로 환산할 수 없다. 이종범은 올해 97경기에 출장해 타율 0.245, 4홈런 29타점을 기록했다. 기록은 평범하지만 수비와 주루는 물론 팀의 맏형으로 클럽하우스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등 소금 같은 역할을 수행해냈다.
조범현 KIA 감독은 이종범의 가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이종범은 모든 야구선수들에게 전설이 아닌가. 고참은 많지만 특히 이종범이 후배들에게 한마디를 조언해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종범 같은 선수가 안타 하나, 도루 하나를 보여주는 것 자체로 젊은 선수들에게는 살아있는 교훈이 된다.
실리적으로 봐도 이종범을 보기위하여 경기장을 찾아오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가. 구단 입장에서도 이종범이 있다는 것이 관중동원이나 팬서비스 차원에서 큰 이득이다. 그런 선수를 굳이 자신도, 팬들도 원하지 않는데 여론을 억지로 거슬러가며 은퇴시켜야할 이유가 있겠나.”고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이종범에게 앞으로 현역 선수로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종범에게 50~60살까지 뛰면서 전성기의 활약을 재현해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단지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이라도 이종범의 플레이를 보고 즐길 수 있는 추억을 만드는 것만으로 팬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양준혁은 은퇴하면서 자신이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언제나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종범 역시 은퇴하는 그날까지 비록 안타를 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 모습을 잃지 않기를 기대한다. 팬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종범의 ‘기량’이 아니라 야구를 향한 변함없는 ‘열정’일 테니까.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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