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타이거즈를 상징하는 대표 투수를 한 명만 꼽으라고 하면 100명이면 99명 이상이 다 선동열 현 삼성 감독을 꼽을 것이다.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동열은 ‘한국야구 사상 역대 최강의 투수’라는 찬사에 걸맞게 0점대 방어율만 세 번이나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며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창조해냈다.
굳이 선동열이 아니더라도 해태 시절의 타이거즈에는 유독 좋은 투수들이 많았다.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임창용, 이대진 등은 모두 전성기 시절 한국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타이거즈 출신의 전설적인 에이스들이다.
전성기의 해태가 투타 모두 워낙 뛰어난 팀이라서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타이거즈는 매년 뛰어난 투수들이 꾸준히 배출되어왔던 투수 레전드들의 고향이었고, 이것이 해태 왕조가 기복 없이 장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타이거즈가 한동안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의 에이스 계보는 왠지 허전하기만 하다. 좋은 투수들은 이후로도 계속 배출되어왔지만, 선배들이 쌓아온 아성에 비하면 뭔가 아쉽다. LG처럼 아예 투수들의 실력 자체가 바닥이거나, 넥센처럼 좀 쓸만해지면 다른 팀으로 팔아 치워서 괜찮은 선수가 부족한 것과는 달리, KIA 투수들은 타고난 재능에 비하여 여러 가지 불운으로 빛을 발하지 못한 선수들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타이거즈 마운드의 특징은 바로 ‘꾸준함’의 차이다. 해태왕조 시절 선동열이나 이강철 같은 투수들이 꽤 오랜 시간 전성기를 유지하며 기복 없는 선수생활을 이어갔던 것과 달리, 최근 몇 년간 타이거즈 투수들은 안정적으로 3~4시즌이상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2000년대 타이거즈 계보에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박복의 아이콘’을 꼽으라면 1순위는 단연 윤석민이다. 2005년 데뷔한 윤석민은 김광현, 류현진과 더불어 한국야구의 세대교체를 이끈 에이스 계보의 한 축을 맡을 선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기량에 비하여 성적은 늘 아쉬웠다. 6시즌 동안 218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3.28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뒀음에도, 통산 승수는 44승에 불과하다.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것은 2008년이 유일했다.
윤석민만큼 타선지원이나 행운 같은 단어와 전혀 인연이 없는 선수도 드물다. 윤석민이 갓 등장하던 데뷔시절은 타이거즈가 창단 이래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2009년 타이거즈가 모처럼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비상했지만 윤석민은 부상 등이 겹쳐 개인기록에서는 수혜를 누리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시즌에는 팀의 패배로 분노하여 라커를 주먹으로 잘못 내리쳤다가 뼈에 금이 가는 황당한 자해성 부상을 당했고, 시즌 후반 롯데전에서 벌어진 사구 파문 때문에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는 등 악재도 끊이지 않았다.
90년대까지 타이거즈 에이스들이 김성한, 김봉연, 이순철, 한대화, 이종범, 홍현우 등으로 이어지는 걸출한 타자들의 지원을 아낌없이 받았던 것과 달리, 2000년대의 KIA 투수들은 CK포(최희섭-김상현)이 맹활약했던 2009시즌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타선지원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2009년 최고의 외국인 투수로 꼽혔던 로페즈 조차도 이듬해 극심한 타선지원 부족 속에 울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덕아웃의 난동꾼’으로 전락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타고난 재능에 비하여 부상이나 자기관리 실패로 불운의 세월을 곱씹어야 했던 선수들도 있다. 90년대 타이거즈 최강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이대진은 데뷔 첫 6시즌인 98년까지는 76승을 수확했으나, 이후 100승 고지에 올라서기까지 무려 11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고질적인 부상과 타자전향의 실패 등으로 인하여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윤식민과 함께 타이거즈 마운드의 ‘우울증’ 계보를 잇는 선수들로는 한기주와 김진우가 대표적이다. 2007~2008년 2시즌 동안 51세이브를 올리며 KIA의 수호신으로 군림했던 한기주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의 연이은 구원실패로 ‘불기주’라는 닉네임을 얻은 데 이어, 지난해는 팔꿈치 부상이 악화되며 전열에서 이탈했고 결국 온전히 한 시즌을 날렸다. 다음 시즌 선발 전환을 목표로 최근 KIA 3군에서 재활에 전념하고 있지만, 회복속도가 늦어서 역시 시즌 초반 등판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진우는 한때 ‘천재투수’라고 불릴 만큼 많은 기대와 주목을 받았으나 자기관리의 실패로 무너진 대표적인 케이스다. 2002년 데뷔 이래 6시즌 간 47승을 거두며 두 자릿수 승리도 세 번이나 달성했고 통산 평균자책점이 3.66에 불과할 정도로 수준급 피칭을 했지만, 잦은 이탈과 기행으로 물의를 빚었다. 결국 2007년 또다시 팀을 이탈한 이후 야구와 인연을 끊고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가 최근에야 다시 돌아왔다.
다음 시즌 투수왕국을 꿈꾸는 KIA 마운드의 부활은 바로 이들의 성공적인 귀환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면 사연 없는 곳은 없다지만, 2000년대 이후 타이거즈 마운드에는 유독 많은 한 맺힌 스토리들이 녹아있다.
요즘 타이거즈 투수들의 면면을 보고 있으면 과거처럼 상대의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던 위풍당당함보다는, 군대생활 꼬인 이등병이나 보호관심사병을 바라보듯 손수건부터 꺼내 들어야 할 것 같은 애잔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과연 박복했던 타이거즈의 투수들이 내년에는 함께 웃을 수 있을까?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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