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호의 선택은 일본 잔류도, 원 소속팀인 한화로의 복귀도 아닌 ‘제3의 길’이었다. 이범호가 KIA에 입단하여 한국에 복귀하는 것은, 27일 KIA가 이범호의 영입을 공식발표하기 전까지는 야구계에 정통한 관계자들 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극비리에 추진된 ‘깜짝쇼’였다.
KIA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범호와 계약기간 1년에 계약금 8억원, 연봉 4억원 등 총 12억원에 계약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최종계약은 이범호가 신변을 정리하고 일본에서 귀국하는 즉시 마무리 짓겠다는 입장이다.
2009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일본에 진출했던 이범호는 지난 시즌 초반부터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며 내내 2군에 머물러야 했다. 소프트뱅크가 이범호를 사실상 전력 외 선수로 분류한 가운데, 어차피 올해 일본에 잔류했더라도 별다른 활약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상황. 당연히 국내 복귀설이 거론되었고, 소프트뱅크와 친정팀 한화가 이범호의 복귀에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누기 시작하면서도 한화로의 유턴이 1년만에 성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이범호와 한화의 직접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며 상황은 미묘하게 흘러갔다. 결국 해를 넘긴 이범호와 한화의 협상은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며 끝내 결렬되었고, 이범호의 다음 시즌 거취는 소프트뱅크 잔류로 상황이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타선 보강을 노리던 KIA가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범호 영입을 극비리에 추진하며 전격적으로 타이거스 유니폼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이범호의 선택은 한화와 KIA 팬들 사이에서 엇갈린 반응을 자아냈지만 결국 ‘프로는 비즈니스’라는 기본적인 룰에 충실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범호로서는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는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범호가 만일 올해도 일본에 남아 있었다면, 선수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설 수도 있었다. 올 시즌에도 소프트뱅크에 이범호의 자리는 사실상 없었다. 코칭스태프의 눈밖에 난 상황에서 1년을 더 허비할 경우, 다시 국내 복귀를 검토한다고 해도 몸값의 대폭적인 하락과 기량저하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범호의 KIA 입단을 가장 적극적으로 원한 것은 조범현 감독의 의지로 알려졌다. 조범현 감독은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당시에도 이범호의 엔트리 발탁을 마지막까지 고민했을 만큼 그의 기량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무릎부상에 고전하고 있는 김상현이 외야전향이 예상되는 가운데 공수를 겸비한 이범호를 영입한 덕에 핫코너인 3루의 안정과 함께, 이범호-최희섭-김상현으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의 파괴력에 무게를 한층 더 높일 수 있게 됐다.
이범호가 KIA행을 선택한 것을 두고 한화 팬들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인 이범호가 자신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팀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오히려 전력보강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범호를 눈뜨고 경쟁팀에 빼앗긴 한화의 협상력 부재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이범호의 KIA 입단결정은 불과 1주일 사이에 상당히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범호와 한화 측의 복귀협상이 한달 가까이 이어졌음에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조율에 진통을 겪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양측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 한화 구단 측은 이범호 측이 “연봉이나 여러 가지 조건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난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범호 측은 조건의 차이보다는 처음부터 “한화 구단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는데 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사실 정작 다급한 쪽은 한화였다. 2년 연속 꼴찌에 그친 한화는 중심타선에 무게를 더해 줄 수준급 거포와 송광민이 빠진 3루의 공백이 시급한 문제였다. 한대화 감독도 여러 차례 “이범호는 반드시 필요한 선수”라고 강조하며 구단측에 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한화는 이범호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가장 의문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우선 어차피 한화 외에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범호의 몸값을 떨어지기를 기다렸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이범호를 잡을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리고 KIA가 이범호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이범호를 잡기 위해 무리하게 거액을 투자하기 보다는 KIA쪽에 반대급부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현재로서 이범호가 KIA가 입단할 경우, FA 보상규정에 따라 한화는 KIA로부터 보호선수 18인을 제외한 선수 1명을 자유롭게 지명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한화 구단이 과연 다음 시즌 팀의 전력향상을 위하여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다. 일본무대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이범호에게 거액을 투자하는 게 망설여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범호 문제를 떠나서, 그간 한화 구단의 행태를 보면 2년 연속 꼴찌에도 불구하고 팀의 전력향상을 위하여 과감한 투자나 장기적인 대안모색에는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리빌딩은 감독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 없고 몸값 싼 젊은 선수들 몇 명 키웠다고 하여 금새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일 한화 구단이 이범호를 놓친 이유가 단지 협상력의 부재라면, 그리고 앞으로도 이에 대한 어떤 책임 있는 후속 대책도 내놓지 못한다면 여론의 호된 역풍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소프트뱅크 호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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