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호에게는 지난 2년간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간이었다. 이전까지 이범호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건실한 플레이로 ‘무명신화’를 작성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던 선수였다. 대구 출신이지만 한화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범호를 향해 한화 팬들은 개그맨 오지헌과 닮은 외모를 빗대어 ‘꽃범호’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대전의 프랜차이즈스타로 대접했다.
FA를 코앞에 둔 2009시즌, 그 해 봄에 열린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기회를 잡은 것은 이범호의 인생을 뒤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이범호의 소속팀인 한화의 사령탑이던 김인식 당시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것도 호재였다. 김동주가 빠진 3루 자리를 놓고 고민하던 김인식 감독은 이범호와 최정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두 선수 모두를 발탁했다. 당초 대표팀 합류 자체가 불투명했던 이범호는 운 좋게 대표팀에 승선했고, 최정의 부진을 틈타 주전 자리까지 꿰찼다.
이범호는 WBC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야구의 준우승에 큰 수훈을 세웠고,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 정상급 투수들을 상대로 맹타를 터뜨리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전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이범호가 일약 국민스타로 급부상한 것이나, 일본 야구계의 눈도장을 받게 된 것도 이 WBC에서의 활약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범호의 활약은 프로무대에서도 계속됐다. 한화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던 2009년, 비록 팀은 꼴찌에 그쳤지만 이범호는 부상으로 다소 고생했음에도 25홈런과 79타점을 기록하는 투혼으로 타선을 이끌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은 이범호는 소프트뱅크와 3년 간 총액 3억5,000만엔의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 받고 일본무대 진출의 꿈을 이루었다.
▲ 꽃범호는 왜 비호감의 아이콘으로 전락했나?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이범호의 야구인생은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이범호는 일본 진출을 앞두고 한동안 네티즌의 악플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국내에서 가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프로야구 출범을 주도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하여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이 그분의 은혜를 입었다.”고 예찬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개인 자격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이었지만, 많은 네티즌들은 ‘역사적 전후 관계와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경솔한 발언’이라고 질타를 퍼부었으며, 건실한 이미지의 꽃범호로 사랑받던 이범호가 대중들의 ‘비호감’으로 돌아서며 안티팬을 급격히 양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진출 과정에 있어서도 사실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김인식 전 감독을 비롯한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이범호의 일본 진출에 대하여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던 게 사실이다. 이범호에 앞서 일본으로 진출했던 이종범이나 이승엽, 이병규 등은 국내 무대를 평정하다시피 했던 그야말로 톱클래스의 타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조차도 일본무대에서는 첫해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면 이범호는 국내에 있을 때도 수준급이기는 했지만 톱클래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시즌도 없었다. 국내무대에서도 .265에 불과한 통산타율과 기복 심한 선구안은 투수들의 평균적인 제구력이 국내보다 한 수 위인 일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우려했던대로 이범호는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얻는데 실패하며 험난한 생활을 예고했다. 시범경기와 시즌 초반의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이범호는 시즌 내내 1군과 2군을 오르내린 끝에 48경기에 출장, 타율 2할2푼6리(124타수 28안타) 4홈런 8타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긴 채 일본에서의 첫 해를 마감해야 했다.
일본야구에 대한 이범호의 사전 이해와 준비도 부족했지만, 마땅한 기회도 변변히 주어지지 않았다. 특히 공격도 공격이지만 국내에서는 준수하다고 평가받은 수비 능력에서조차 ‘수준 이하’라는 혹평을 받은 것은 큰 충격이었다. 수비와 멀티포지션 소화능력을 중시하는 아키야마 소프트뱅크 감독은 이범호의 수비력에 대하여 “타구반응속도가 느리고 볼 캐치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며 시큰둥한 평가를 내렸다. 일본야구계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이미 이때부터 감독이 이범호를 눈밖에 놓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본무대에서의 실패 이후 국내 복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이범호는 예상치 못한 많은 잡음에 휩쓸렸다. 소프트뱅크에서 사실상 전력 외 선수로 구분된 이범호는 국내 복귀를 모색했으나, 우선협상권을 가지고 있던 친정팀 한화와의 협상이 난항에 부딪치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이범호가 한화와의 협상이 무산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격적인 KIA행을 결정하면서 또다시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일부 한화팬들은 이범호에 대하여 노골적인 배신감을 드러냈다. 상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일본무대에서 나라망신만 시켰다.” 혹은 “돈만 아는 선수”라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이범호도 그 나름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 당초 이범호는 이미 지난 연말부터 국내 복귀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고, 당연히 한화로의 복귀에 애착을 보였다. 그러나 예상치 않게 구단이 몸값 등의 문제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 이범호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미 소프트뱅크에서도 올 시즌 이범호를 쓰지 않겠다고 방침을 정한 상황이라 그대로라면 꼼짝없이 1년을 더 2군에서 썩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야진과 거포보강이 시급하던 KIA로부터 소프트뱅크에서 받을 연봉을 부담해주는 조건으로 영입제의가 들어왔으니 이범호로서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년간 이범호가 받아야 했던 정신적인 상처는 매우 컸다.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마감한 일본무대에서의 실패, 그리고 일년 사이에 두 번이나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겪어야 했던 혼란 등은 이범호의 커리어는 물론이고 이미지에도 여러모로 좋지 않은 흠집을 남겼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 선수가 자신에게 주어진 옵션을 따라 더 유리한 조건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문제는 지금부터 이범호가 국내 무대에서 얼마나 명예회복에 성공할 수 있느냐다. 야구선수는 어쨌든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실력으로 모든 것을 입증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이범호가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제공=한화 이글스, 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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