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차례나 우승을 거머쥔 타이거즈지만 그 찬란한 역사는 대부분 오른손 투수와 오른손 타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성호를 필두로, 이용규, 최희섭 등이 잇달아 활약하며 좌타자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했지만, 최근까지도 팀 내에서 왼손투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극히 낮다. 지난 시즌, 조범현 감독은 승부처에서 왼손 타자를 만나면 곽정철이나 김희걸, 안영명 등과 같은 오른손 투수들을 내세우며 변변찮은 왼손 투수가 없는 어려움을 몸소 보여줬다.
▲ 왼손잡이와는 인연이 없었던 타이거즈의 역사
해태 왕조를 진두지휘 한 김응룡 전 감독은 언제나 왼손 거포에 목말라 했다. ‘콧수염 홈런왕’ 김봉연을 비롯하여,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김종모, 홍현우, 이종범 등 뛰어난 오른손 타자는 숱하게 배출해냈지만, 왼손 타자는 장성호를 제외하면 전멸이나 다름없었던 현실이 과거 해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KIA로 팀이 바뀌면서 기존에 장성호를 비롯해, 이용규와 최희섭 등이 가세하여 좌타자에 대한 갈증은 일정 부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왼손 타자는 이견의 여지없이 장성호지만, 그가 조범현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난 현재, KIA의 4번 타자를 맡고 있는 최희섭은 ‘타이거즈 역사상 최고의 좌타 거포’라고 불릴 만하다. 2009시즌 최희섭이 친 33개의 홈런은 해태시절까지 포함하여 토종 타이거즈 왼손 타자가 기록한 최다 홈런이었다.
그러나 좌완 계투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선동렬, 이강철, 조계현, 이대진, 이상윤, 임창용, 등 리그를 주름잡은 오른손 투수는 많이 배출해냈었지만, 타이거즈 역사상 50승 이상을 기록한 왼손투수는 ‘까치’ 김정수(88승)와 신동수(52승) 두 명뿐이다. 그리고 리그에서 손꼽을만한 좌완 불펜을 가져본 시즌도 1996년의 김정수(40경기 18세이브 평균자책 2.01)와 95년부터 97년까지 125경기에 나와 2.80의 평균자책을 기록한 강태원 정도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당시 가난했던 해태 사정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2억4,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안겨줬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기대를 받고 입단한 왼손 투수 오철민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9시즌 동안 현역으로 뛰었지만, 25⅓이닝을 투구하여 1.78의 평균자책을 기록한 2003년을 제외하면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준 시즌은 한 차례도 없었다.
▲ 너무 빨리 포기한 전병두
가장 최근 KIA 불펜에서 돋보이는 기량을 선보인 왼손 투수는 2005년의 전병두였다. 당시 전병두는 시즌 중반 리오스와 트레이드되고 KIA에서 27경기에 등판해 35⅔이닝을 투구하는 데 그쳤지만, 2승 5세이브와 .151의 낮은 피안타율로 팬들에게 어필했다. 150km/h에 육박하는 빠른 직구는 상대 타자의 방망이를 잠재웠고, 9.59의 9이닝당 탈삼진 비율은 당시 변변찮은 마무리 투수감이 없었던 타이거즈에 유력한 마무리 후보로 지목되기 까지 했다.
전병두의 위력적인 구위는 삼성 선동렬 감독의 눈에 들게 됐고, 이윽고 WBC 대표선수로 선발되기에 이른다. 비록 WBC에서 전병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지만, 국가대표 야구팀이 4강 진출로 병역 혜택을 받아, 전병두는 ‘빠른 공을 던지는 군필의 젊은 왼손 투수’가 됐다. “왼손 파이어볼러는 지옥에서라도 건져와야 한다”는 격언에 따른다면, 전병두의 가치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KIA 역시 전략적으로 전병두 키우기에 들어갔다. 2006년에는 선발로 기용하면서 선발투수로의 성장 가능성을 시험했다. 전병두는 선발로 나선 15경기에서 5승 6패 평균자책 4.56의 평범한 성적에 그쳤지만 나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3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부상과 부진이 겹치고, KIA의 사령탑이 조범현 감독으로 바뀌면서 전병두에게는 불행이 닥쳤다. 2007년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전병두는 2008시즌에 긴 재활에서 돌아왔지만, 복귀하자마자 자신의 좋을 때의 공을 보여주진 못했다. 조범현 감독은 부진한 투구로 일관하던 전병두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렸고, 주전 포수 김상훈이 부상으로 장기간 이탈하자, 포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SK의 2군 선수 3명을 받고 전병두를 보내는 엽기적인 트레이드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2009년 조범현 감독이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팀으로 이끌면서 팬들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2008년에 단행한 ‘전병두, 김연훈 <-> 이성우, 채종범, 김형철’ 트레이드는 당시 상황으로도,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프로야구 역사에 손꼽을만한 최악의 트레이드로 기록됐다. 현재 전병두는 SK의 주축 투수가 되었고, 김연훈 역시 1군 주전 멤버로 자리 잡았지만, 이성우, 채종범, 김형철은 KIA에서도 2군에 더 오래 머무르고 있는 선수에 불과하다(김형철은 2010시즌 후 방출).
▲ 전병두 이후 변변한 왼손 불펜투수 한 명 없어
2005년 전병두의 활약을 끝으로 KIA 불펜에서 왼손 투수가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2006시즌 KIA 소속으로 1군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져본 왼손 투수는 전병두, 박정태, 진해수 정도이며, 박정태가 40⅓이닝 동안 3.57의 평균자책과 4개의 홀드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고 시즌 후 불의의 부상을 당해 재활에 매달리다가 얼마 전 군복무를 마치고 팀에 합류했다.
2007시즌에는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변화구와 컨트롤이 좋은 문현정이 1군 마운드에서 51⅔이닝을 1군 마운드에서 던졌지만, 6.10의 평균자책과 .870의 피OPS를 기록하며 1군 무대에 자리 잡는 데 실패했다. 진해수 역시 36이닝을 던졌지만 문현정과 마찬가지로 6.75의 높은 평균자책을 기록해 2군에서 던지는 일이 더 많게 됐다. 다행히 당시 신인이었던 양현종이 49⅔이닝 동안 4.17의 평균자책을 기록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8년에는 양현종을 제외하면 1군에서 20이닝 이상 투구한 좌완 투수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첫 해에 가능성을 보여준 양현종 마저 두 번째 해에는 75⅔이닝 동안 5.83의 평균자책과 9이닝 당 6개에 육박하는 볼넷허용률을 기록하며 팬들로부터 ‘어째서 2군에서 키우지 않느냐’는 원성까지 들은 바 있다. 이후 양현종은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며 김정수 이후 끊어지다시피 한 타이거즈의 왼손 에이스 계보를 이어가고 있지만, 양현종은 선발투수로 활약했고, 불펜은 여전히 왼손 투수 갈증에 시달렸다.
상대의 강한 좌타자를 막을 확실한 왼손 투수가 없는 탓에 조범현 감독은 왼손 타자에 약점이 있는 사이드암 투수인 손영민과 유동훈을 그대로 내보내기 일쑤였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곽정철을 마운드에 내세웠다. 2009년의 유동훈과 손영민은 절정의 구위를 자랑하고 있던 터라 상대 좌타자들도 잘 막아주었지만, 이듬해 바로 사이드암의 한계를 노출하며 왼손 타자에게 결정타를 종종 허용하곤 했다.
▲ 2010년, 박경태와 박정태 그리고 심동섭
이렇게 기대를 모았던 투수들이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지 못하던 상황에서 박정태는 입대했고, 문현정은 최근 방출됐으며, 진해수 역시 현재 군복무 중이다. 그나마 최근 성장세를 보이며 팬들에게 주목 받는 선수가 박경태다. 2006년 2차 신인 드래프트에서 손영민, 박정규 다음으로 지명된 박경태는 고교 시절에는 큰 두각을 보이지 못했지만, KIA 스카우트는 박경태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그를 지명했다.
박경태는 입단 3년차에 처음으로 1군 마운드에 올라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최근 2시즌 동안 KIA 왼손 불펜투수 중에 가장 많은 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140km/h 중반대의 좋은 직구를 가지고도 변화구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탓에 왼손 타자 상대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경태는 2009년에 좌타 상대 피안타율 .345, 우타 상대 .225였고, 작년에도 좌타 .314, 우타 .224로 보통의 좌완 투수들과 정반대의 성적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구력과 빠른 직구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제2의 구질만 장착한다면 좋은 왼손 릴리프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박경태와 더불어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주목 받는 선수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박정태다. 박정태는 이미 2006시즌에 1군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적이 있다. 다만, 이 당시에도 제구력에 문제가 많아, 빠른 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실전에서 활용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올 시즌 타이거즈 불펜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전망이다.
KIA가 재작년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로 뽑은 심동섭도 유망한 자원이다. 비록 빠른 공을 던지지는 않지만 185cm/85kg의 좋은 하드웨어를 갖춰 높은 성장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이 심동섭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다. 그러나 아직 1군에서 주축 선수로 활용하기에는 다듬을 부분이 많다는 평이 많다. KIA는 정용운, 임기준 등 최근 드래프트 3라운드 안에 잇달아 왼손 투수를 지명했지만, 아직까지 1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로선 심동섭의 활약을 예견하기가 어렵다.
▲ 좌완 악연, 올해는 끊을 수 있을까
바야흐로 지금은 프로야구 역사상 유래 없는 왼손 투수 전성시라고 할 수 있다. 류현진, 김광현을 비롯해 봉중근, 장원삼, 양현종, 장원준 등이 맹활약하고 있으며, 최근 4년간 투수 다승 TOP 5에 이름을 올린 국내파 오른손 투수는 송승준 한 명뿐이다. 불펜으로 눈을 돌려도 권혁, 정우람, 이승호 등 리그에서 손꼽는 강팀들은 모두 뛰어난 왼손 투수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최강자 SK에는 어느 팀을 가더라도 핵심 투수로 활약할 수 있는 뛰어난 기량의 왼손 투수가 다수 포진해 있다.
지난해 왼손 투수 상대로 .220의 타율을 기록한 데 그친 김현수는 변변찮은 왼손 불펜 한 명 없는 KIA를 상대로 .460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김현수뿐 아니다. SK의 4번 타자 박정권은 .375의 타율을, 삼성의 4번 타자 최형우는 .349, 박한이 .339 등 KIA와 우승 경쟁팀들의 중심 좌타자들은 대개 KIA를 상대로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KIA 왼손 투수들의 기량이 얼마나 뒤쳐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통계다.
올 시즌에는, KIA가 타이거즈 역사를 통틀어 인연이 멀었던 왼손 릴리프를 발굴해낼 수 있을까? 박경태, 박정태, 심동섭 등 유망주들은 많이 갖추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들이 1군 무대에서 통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KIA가 왼손 불펜의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다면, 포스트시즌 진출도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진출한다 해도 가을잔치에서 맞부딪힐 상대의 왼손 강타자들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 Lenore 신희진 [사진제공=KIA 타이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