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평가받고 있는 트레버 호프만이나 마리아노 리베라는 등판 자체만으로 상대팀의 추격의지를 무력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호프만이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그라운드에 울린 그의 테마음악인 ‘Hells bells’은 말 그대로 상대팀에게는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지옥의 종소리와도 같았다.
이러한 대형 마무리투수들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탁월한 구위 못지않게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오는 꾸준함이다. 1993년 프로에 데뷔한 호프만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16시즌 동안 은퇴할 때까지 줄곧 마무리로 활약해오며 개인통산 601세이브로 역대 기록을 수립했다. 만 42세인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마리아노 리베라가 559세이브로 그 뒤를 추격하고 있다.
대개 1이닝 안에 전력투구로 팀의 승리를 지켜내야 하는 마무리는 선발이나 계투보다도 정신적 압박감이 훨씬 심한 보직이다. 이들은 10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 중압감이 큰 마무리 보직을 수행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메이저리그 최강의 투수로 군림했다.
하지만 출범 30년째를 맞이하는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아직 호프만이나 리베라와 비견할만한 ‘장수형’ 마무리투수를 찾기가 쉽지 않다. 100년 역사가 넘는 메이저리그와 비교하여 600세이브는 고사하고 아직 300세이브를 돌파한 선수도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국내 프로야구 통산 세이브 1위 기록은 김용수(227세이브)가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무대를 거쳐 일본으로 진출한 임창용이 한일 프로리그 통산 264세이브를 기록하며 한국인 투수로는 역대 최다세이브 비공식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전문 마무리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임창용은 올 시즌 36세이브를 추가하면 대망의 300세이브 고지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임창용을 제외하면 한국야구의 마무리 기록은 빈곤한 편이다. 100세이브를 넘긴 선수 중에서 현재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는 단 2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현역선수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오승환(170세이브)도 2009년 이후 페이스가 주춤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불펜투수, 특히 마무리 투수는 장수하기 어려운 보직으로 꼽힌다. 마무리투수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지만, 당시에도 셋업맨이나 롱릴리프와의 분업화 개념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마무리투수가 7회나 8회는 물론이고 아예 6회 이전에 등판하고 연투까지 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빈번했다.
호프만이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히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부단한 노력도 있었지만, 메이저리그의 철저한 투수분업화에 따른 이닝과 투구수 관리의 영향이 컸다. 호프만은 프로 경력 내내 총 1035경기에 등판했으나, 1089와 1/3이닝밖에 던지지 않았다. 빅리그 생활 내내 선발로 뛴 경력이 없는 호프만의 투구이닝을 평균으로 계산해보면 경기당 1이닝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혹사가 없으니 부상이나 체력적 부담으로 인한 슬럼프가 올 확률도 그만큼 낮아진다. 호프만이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꾸준히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마무리투수로 장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반면 한국의 투수들은 어땠을까. 일단 한국의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발이건 마무리건 현역생활 내내 한 가지 보직에서만 꾸준히 활약하는 선수는 찾기 드물다. 통산 세이브 상위기록에 위치하고있는 김용수, 구대성, 임창용, 정명원 등은 모두 리그 정상급 마무리 투수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팀 사정에 따라 다시 선발과 불펜을 넘나들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김용수는 유일하게 100승-200세이브를 동시에 기록했는데, 풀타임 선발투수로 3시즌 이상을 활약했고 최고령 다승왕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호프만과 똑같이 16시즌을 활약한 김용수의 통산 소화이닝은 무려 1831과 1/3이닝으로 훨씬 많다.
구대성과 임창용은 전성기 시절 ‘고무팔’의 대명사였다. 1990년대 최강의 전천후 투수로 군림했던 구대성은 지나친 다재다능함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케이스다. 1996년 MVP를 차지했을 당시 구대성은 구원투수였음에도 18승 24세이브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대기록을 세운 셈이고, 무려 139이닝이나 소화한 ‘선발형 마무리’라는 웃지 못할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임창용은 해태와 삼성 시절 1997~99년간 마무리투수로 활약하면서도 3년 연속 133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살인적 혹사를 당하기도 했는데, 아무 때나 부르면 무조건 등판한다고 ‘애니콜’이라는 웃지 못할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 프로야구 구원투수들의 평균 소화이닝은 2이닝 이상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투수의 어깨는 많이 던질수록 닳는 법이다. 같은 투구수로라도 마무리투수 1구는 선발의 1구와는 중압감의 차원이 다르다. 선발투수와는 훈련과정이나 몸 관리 방식부터가 다르고, 심리적인 냉철함 같은 적성의 문제도 민감한 부분이다.
한번 선발이나 마무리로 보직이 결정되면 어지간하면 쉽게 바뀌지 않는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성적에 대한 욕심이나 코칭스태프의 무리한 실험 등으로 자주 보직이 변경되고 무분별한 혹사에 노출되기 쉬운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장수하는 전문 마무리투수란 언감생심이다.
한국프로야구는 최근 몇 년간 마무리 대란에 시달리고 있다. 돌려막기로 일관하는 기형적인 불펜 운영이 대세가 되어버린 한국야구의 현실 속에서 4~5년 이상 마무리 보직에서 꾸준한 성적을 올리는 선수는 점점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고정된 마무리 없이 집단 마무리 체제를 채택했던 지난해 SK나 삼성의 경우, 마무리와 셋업맨, 롱릴리프의 개념이 무너지면서 불펜투수들이 과부하에 걸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당장은 몰라도 이런 식의 투수운용은 언젠가는 투수들의 몸에 부작용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승리라는 과실에 가려져있지만, 투수분업화의 개념이 점점 퇴보하고 있는 한국야구의 현실 속에서 우리 마무리 투수들의 단명 현상은 필연에 가깝다.
// 구사일생 이준목 [사진=SI.com,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