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일본에서 야구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초라하다. 현재 일본무대에 진출해있는 한국인 스타들 가운데 야쿠르트의 임창용을 제외하면, 다른 선수들은 대체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을 자랑하는 박찬호는 7경기에 등판해 1승 5패, 평균자책점 4.29를 기록하며 한달 사이에 두 번이나 2군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맛봤다.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이나 김태균도 부진을 겪으며 슬러거답지 않게 좀처럼 홈런포를 쏘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인 선수 중 유일하게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경험을 갖춘 김병현은 아직 1군 경기에 한 차례도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 무대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던 선수들이다. 전성기가 지났다거나 부상 같은 이유도 있지만, 한국 최고의 투수와 타자들이 일본에서 평균 이하의 선수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 무대가 일본이기에 한국 팬들 입장에서는 국민감정이라는 차원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야구가 한국보다 다소 수준이 높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0년 전이나 20년 전처럼 결코 넘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최고 수준의 선수들은 이미 일본 선수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기량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WBC나 올림픽 같은 국제무대에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일본보다 한 수 위인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검증 받은 선수들이 즐비하고, 마인드나 몇몇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오히려 일본 선수들을 뛰어 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한국인 스타들이 일본에서 고전하는 이유로 실력보다는 ‘적응’의 문제를 꼽는다. 이것은 단지 일본야구에서 뛴 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물리적 차원의 시간이나 경험 개념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빅리그급 경력을 지닌 외국인 선수들이 이상하리만큼 실력발휘를 못하고 쫓겨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면 한국야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시했거나, 한국야구만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일본야구는 한국야구와도, 미국야구와도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일본야구를 가리켜 흔히 ‘현미경 야구’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예를 들어 미국야구가 기교보다는 힘으로 정면 승부하는 스타일이라면, 일본은 보다 정교하고 분석적이다. 메이저리그가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을 극대화하여 승부하는 스타일이라면, 일본은 철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꽉 짜인 틀 안에서 상대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초점을 맞춘다.
비교하자면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발휘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방식(메이저리그)과 ‘상대에 맞춰서 가장 약한 부분을 공략해 무너뜨리는 것’을 추구하느냐(일본)의 차이다. 그리고 한국야구는 그러한 미국과 일본 스타일의 중간점 어딘가에 놓여있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을 살펴보면 한때 잘하다가도 오래가지 않아 장단점이 간파당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야구는 선수들의 아주 사소한 동작과 버릇도 놓치지 않기로 정평이 나있다. 한국 선수들이 WBC나 올림픽 같은 단기전에서는 일본 선수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지만, 막상 일본에 진출하면 많게는 한 팀 당 스무 번 이상 맞대결을 펼쳐야 하는 장기레이스 속에서 장단점이 파악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설사 한두 시즌 반짝했다고 할지라도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일본야구에서 2~3시즌 이상 꾸준히 활약하는 선수들은 찾기 힘들다. 선동열이나 임창용같이 일본에서도 비교적 장수하는 선수들이 평균 1이닝 이하를 던지는 마무리 투수라는 점은 단지 우연처럼 보이지만은 않는다.
선동열만 하더라도 일본 야구 진출 첫해 혹독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보통 일본야구에서 한번 적응에 실패한 선수는 다시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선동열이 부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현지화’에 있었다.
선동열은 주니치 시절, 일본야구에 적응하기 위하여 한국 시절의 습관과 자존심을 모두 버렸다. 일본식의 분석야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평소 훈련은 물론이고 밤을 새며 일본야구를 연구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주변의 조언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라운드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항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고 철저한 자기관리를 보였다.
선동열은 은퇴 후 감독까지 거친 지금도 현재 한국의 야구인을 통틀어 가장 일본야구에 정통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일본에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에서 습득한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는 그의 지도자 생활에 있어서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선동열이 여느 한국인 선수들과 차별화되었던 부분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보통 슬럼프가 오면 스스로 혹독하게 훈련량을 늘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한국 선수들의 훈련량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세계적이다. 하지만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들이라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 혹은 상대 선수들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나 분석을 통한 목표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코칭스태프가 한국처럼 외국인 선수들에게 세세한 기술적인 조언까지는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승엽은 지바 롯데에 입단했던 일본 야구 첫해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2년차였던 2005시즌과 요미우리 입단 첫해인 2006시즌에는 맹활약을 펼치며 일본에서도 정상급 타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당시 이승엽 부활의 숨은 일등공신은, 바로 당시 지바 롯데에서 코치로 활약하며 이승엽의 타격지도를 전담했던 김성근 현 SK 감독의 존재였다.
누구보다 데이터에 강하고 일본야구에 정통했던 김성근 감독은 이승엽에게 일본야구의 기술적 스타일은 물론, 마인드에 있어서까지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엽이 2007년 이후 부상과 부진에 허덕이며 다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김성근 감독과 같은 조언자가 없었다.
메이저리그 124승 경력의 박찬호나, 일본무대만 8년차인 이승엽이 일본리그에서 하위권 팀인 오릭스에서조차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초라한 현실은, 냉정히 말해 그들이 현재 일본야구의 본질을 제대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야구선수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의 경험과 노력을 무시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노력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노력의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가 아닐까. 상대가 그들을 분석한다면, 그들 역시 상대와 자기 자신을 더욱 철저히 분석하고 갈고 닦아서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프로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 구사일생 이준목 [사진=티스토리 뉴스뱅크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