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실력과 기량을 갖추고도 조망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있다. 동일한 포지션에 뛰어난 대스타가 있거나, 소속팀의 투수력이 강해 돋보이지 않는다거나, 출루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타율이나 홈런같은 클래식한 스탯은 돋보이지 않는다거나, 비인기팀 소속이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등, 소외된 곳에서 빛나는 활약을 보인 선수들은 매해 있기 마련이다.
2011년에도 많은 선수들이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부족했다. 만약 SK의 박희수가 포스트시즌에서 빼어난 피칭을 보이지 못했다면, 그의 피안타율(.175)이 정우람(.189)보다 낮고, 기출루주자 실점율이 13.3%에 불과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나마 포스트시즌에서의 대활약은 박희수의 이름을 돋보이게 했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신인왕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박희수처럼 깊숙한 곳에 박혀 잘 보이지 않았던 숨은 진주들이 또 누가 있는지 찾아보자.
▲ 정인욱, 삼성의 강력한 투수진만 아니었다면...
31경기 등판 80이닝 투구, 6승 2패 평균자책 2.25, WHIP 1.10, 피안타율 .199
지난 시즌, 정인욱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한국시리즈의 중요한 경기마다 나와 결정적인 실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당시 정인욱의 나이는 불과 스물 한 살이었다. 지난해의 아픔 때문이었을까, 올해 정인욱은 한층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2.25의 평균자책점은 팀 내에서 오승환 다음으로 뛰어난 평균자책점이다. 1할 9푼 9리의 피안타율은 전체 경기 수의 반 이상의 이닝을 투구한 투수들 가운데 네 번째로 뛰어난 기록이다.
게다가 정인욱은 올해 뚜렷한 보직 없이 선발과 불펜을 오갔다. 중요한 순간에 등판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선발로 나선 9경기에서 4승 2패 3.33의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퀄리티스타트도 세 차례 기록했고, 9월 23일 넥센전에서는 7이닝 동안 상대 타선을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막았다. 선발투수로 등판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한 정인욱은, 불펜으로 나왔을 때는 더욱 무시무시한 투구를 보여줬다.
그는 불펜으로 나선 22경기 가운데 2경기에서만 점수를 내줬다. 31과 1/3이닝 동안 평균자책 0.57을 기록했고, 피안타율은 .147에 불과하다. 올 시즌 오승환의 평균자책은 0.63이고, 피안타율은 .140이다. 물론, 오승환이 조금 더 중요한 상황에서 나왔고, 정인욱보다 20이닝 이상을 더 투구했지만, 불펜으로 나왔을 때 정인욱의 성적은 오승환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정인욱은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투수 중 한 명이다. 흙 속의 진주라 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찬란히 빛나는 보석이다. 하지만 그의 소속팀이 투수력이 강한 삼성이 아니었다면, 올 시즌 선발 혹은 셋업/마무리로서 자신의 이름을 더욱 드높였을 것이다. 당장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년에 정인욱은 선발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삼성에서도 젊은 토종 선발 투수의 성장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아직은 이르지만, 우리는 빠른 시간 안에 제2의 윤석민이 삼성에서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 엄정욱, 와일드씽 이렇게 잘한 줄은 몰랐지?
20경기 등판 50⅔이닝, 3승 2패 6세이브, 평균자책 2.13, WHIP 1.03, 피안타율 .188
올해 엄정욱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지 않은 타 팀팬이라면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KIA의 차일목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한 모습만 생각날 수 있다. 하지만 올해 엄정욱은 만년 유망주에서 벗어나 SK의 차기 마무리로 자리 잡은 한 해로 평가할 수 있다.
과거 엄정욱은 현역 프로야구 투수들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을 던지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2004년 105 1/3이닝을 투구하며 7승 5패 평균자책 3.76의 성적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다섯 시즌 동안 16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빠른 공을 던졌지만,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과 잦은 부상은 그의 성장을 막았고, 지난 시즌 34경기에 등판하며 모처럼 1군 무대에 모습을 비췄지만 6.27의 평균자책과 9이닝 당 5.45개에 이르는 많은 볼넷은 나이 서른을 넘은 엄정욱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올 시즌 엄정욱은 컨트롤이 부쩍 좋아지며 9이닝당 볼넷이 3.38개까지 줄었다. 빠른 공은 여전히 위력적이어서 9이닝당 탈삼진은 11.37개로 오승환(12개)에 근접한다. 다만, 8번의 세이브 상황에서 두 번의 블론을 기록하며 세이브 성공률이 썩 좋은 편은 되지 못하며, 6명의 기출루주자 가운데 반인 3명을 홈으로 들여보낸 것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정대현의 MLB 진출로 SK의 마운드는 더욱 얇아졌다. 내년 시즌 엄정욱의 활약이 더욱 중요한 이유다.
▲ 한희, LG의 아킬레스건 내가 치료한다!
47경기 등판 67⅓이닝 2승 1패 7홀드, 평균자책 2.27, WHIP 1.02, 피안타율 .198
앞서 언급한 정인욱보다 피안타율이 낮은 선수가 LG의 한희다. 한희보다 피안타율이 낮은 투수는 리그에 딱 두 명(정우람, 박희수) 뿐이다. 보통 볼넷이 많은 투수들이 피안타율 역시 낮은 경향이 있지만 9이닝당 볼넷허용이 2.94개일 정도로 제구력도 뛰어나다. 한희와 비교할 수 있는 정인욱은 9이닝당 볼넷이 3.60개이며, 피안타율에 비하면 피장타율(.337)이 높은 것이 약점이지만 한희는 피장타율(.270)마저 낮다. 역시 박희수와 정우람을 제외하면 한희보다 피OPS가 뛰어난 투수는 없다.
LG는 이번 FA 시장에서 큰 대가를 지불하고 트레이드해온 송신영을 허망하게 떠나보냈고, 신인왕을 아쉽게 놓친 임찬규는 내년에 선발로 뛸 수도 있다. 임찬규나 봉중근이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하더라도 LG의 구원진은 강하다 평하긴 어렵다. 하지만 한희가 올해와 같은 성장세를 내년에도 이어가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송신영의 공백은 최소화할 수 있으며 올해와 같은 잦은 역전패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올해 한희는 중요한 시점에서 투입 됐다기 보다는 아직 어린 나이를 감안하여 부담감이 덜한 상황에서 나온 경기가 많았다. 하지만 후반기 LG의 순위 싸움이 한창일 때는 중요한 경기에도 등판해 깔끔한 투구를 보였다. 월별 투구기록을 보면 한희의 가장 좋았던 시기는 후반기였다. 올스타 전 이전에는 .265의 피안타율을 기록하며 평범했던 투수가 올스타 전 이후에 .148의 피안타율을 기록했다. LG가 치열하게 4강 다툼을 벌였던 시기다. 이번 FA 시장에서 주축 선수를 많이 잃은 LG에게 희망이 있다면, 한희의 성장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 안치용, 박현준 트레이드 손해만 본 줄 알았지?
93경기 타율 .311 출루율 .426, OPS .938, 12홈런 42타점
올 시즌 초반 박현준이 센세이셔널한 투구를 보이며, 맹활약할 때 많은 SK팬은 속앓이를 했다. 박현준 뿐 아니라 LG는 함께 트레이드해온 김선규와 윤상균의 활약으로 가장 먼저 30승 고지에 오르기도 했다. 반면, 탑 유망주를 내주면서 받아온 선수들인 최동수, 안치용, 권용관의 활약은 미미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안치용이 맹활약하면서 SK팬들은 박현준을 보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전반기까지 타율 .247, OPS .642를 기록하며 백업요원에 지나지 않았던 안치용은 후반기 들어 55경기에서 .342의 타율과 1.086의 OPS를 기록했다. 후반기 OPS만 보면 이대호(1.008)보다 높고 최형우(1.139)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이다. 후반기 홈런 개수는 홈런왕 최형우(11개)보다 하나를 더 쳤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의 막강한 투수진에 막혔지만, 안치용의 활약은 플레이오프까지도 계속됐다. 안치용의 후반기 대분전이 없었더라면, SK는 플레이오프는커녕, 포스트시즌 진출도 낙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안치용의 활약은 올해보다 내년이 더욱 중요하다.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 잡았지만 LG 시절에도 단 기간 좋은 모습을 보였다가 나빠지는 기복을 종종 보여 왔기 때문이다. 만약 안치용에게 기복이 없었다면, 우타자가 부족한 LG의 현실상 그를 떠나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택근을 사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년이면 서른네 살이 된다. 많은 나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젊은 나이라 하기도 어렵다. 안치용이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흙 속의 진주가 아닌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다면, 올 시즌 후반기의 모습을 한 시즌 내내 보여줄 필요가 있다.
▲ 황재균, 다이너마이트 롯데 타선에 가렸을 뿐...
117경기 타율 .289 출루율 .360 장타율 .445 OPS .805, 12홈런 68타점
넥센 소속일 때 황재균은 리그에서 가장 촉망받는 3루수였다. 하지만 시즌 중 롯데로 트레이드 된 해에 황재균은 2할 2푼 5리의 저조한 타율에 그쳤다. 유격수로는 실망스러운 수비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재균은 이대로 추락하지 않았다. 2010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부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올해 2할 후반대의 타율과 강타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OPS 8할을 넘기며 롯데 하위타선의 핵으로 활약했다.
8개 구단 3루수 가운데 황재균보다 OPS가 높은 선수는 SK의 최정과 KIA의 이범호 정도뿐이다. 삼성의 박석민도 있지만, 수비가 좋지 못해 지명과 1루수도 겸하고 있어 공수를 두루 갖춘 3루수라 보기엔 어렵다. 황재균이 돋보이지 않은 것은 단순히 롯데에 그보다 뛰어난 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대호를 비롯해 손아섭, 전준우, 김주찬, 홍성흔 등 롯데는 타 구단에 비해 뛰어난 타자들이 즐비하다. 황재균이 만약 넥센 소속으로 계속해서 뛰었다면, 넥센에서 가장 OPS가 뛰어난 타자로 변모한다.
87년생의 황재균은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성장통을 겪었지만, 나빴던 선구안도 해를 거듭할수록 좋아지고 있고, 유격수 수비는 불안하지만, 3루수 수비에서는 물샐 틈 없는 방어력을 자랑하고 있다. 플레이오프에서 비록 SK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황재균의 수비가 없었다면, 롯데팬들은 조금 더 일찍 짐을 싸고 야구장을 떠났을 것이다. 내년에는 팀 타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대호가 떠난다. 많은 롯데 팬들이 황재균의 좀 더 높은 성장을 바라는 이유다.
// Lenore 신희진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