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2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가고 그 사회와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류 최대의 재난이다.
하지만 그 전쟁이 스포츠인 야구, 그것도 한국도 아닌 메이저리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서 방망이 대신 총을 들고 싸웠던 벽안의 야구 선수들이 있었다.
▲ 파일럿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한 테드 윌리엄스
한국전의 영웅 중 야구선수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다. 윌리엄스는 한국전 참전 이전에 2차 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미 2차 대전에서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방망이를 내려놨던 윌리엄스는 꼬박 3년을 비행교관으로 복무하며 종전 시까지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다시 방망이를 잡으면서 맹타를 휘두르던 윌리엄스는 1952년 4월 30일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친 뒤 군(軍)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해 겨울 윌리엄스는 “난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한국으로 급파된다.
1953년 2월 16일, 대위계급장을 가슴에 단 윌리엄스는 평양 남쪽의 북한군 막사와 보급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정확히 목표지점을 폭파 시킨 뒤 기수를 돌리는 중에 북한군의 대공포를 맞고 추락위기에 처하고 만다. 윌리엄스는 강한 의지로 수원공군기지까지 날아간 뒤 동체 착륙을 시도했고, 기체가 활주로에 심하게 부딪혔지만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고 태연하게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고 한다.
1953년 6월, 39번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쉴 겨를도 없이 소속팀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세인트루이스 전에 대타로 나왔다. 윌리엄스는 시즌 막판 팀에 합류했지만 37경기에서 13개의 홈런을 포함, 0.407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2차 대전과 달리 한국전쟁은 그의 전성기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1946~51년 사이에 평균 33홈런 124타점을 기록했던 윌리엄스는 54년 이후로는 평균 26홈런 77타점의 다소 아쉬운 성적에 그쳤다. 물론 타격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윌리엄스이기에 57년과 58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하고, 40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1960년에는 29홈런을 터뜨려 통산 500홈런을 넘어서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많인 경기에 결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의 기록을 상당부분 갉아먹고 말았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전쟁으로 인한 5년의 공백 때문에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만약 참전하지 않았다면 윌리엄스는 700홈런과 2400타점, 2400득점을 모두 넘어설 수 있었을 것이며, 타점과 득점은 여전히 역대 1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의 MVP와 두 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타격에 관한한 ‘역대 메이저리그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윌리엄스는 1960년을 끝으로 통산 521홈런 1839타점 1798득점 2021볼넷 709탈삼진 .344/.482/.634(타율/출루율/장타율)의 화려하고도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 ‘다저스의 흑인 에이스’ 돈 뉴컴의 참전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신인왕, 사이영상, MVP를 모두 받았던 '흑인 투수' 돈 뉴컴도 한국전 참전용사다. 1949년 팀 동료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및 인디언스의 래리 도비 등과 같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 이기도 한 뉴컴은 1952년부터 2년간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며 낯선 한국 땅을 밟았다.
참전하기 전까지, 뉴컴은 정말로 잘 나가는 투수였다. 1949년 17승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이후 50년 19승, 51년에는 처음으로 20승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LA 다저스의 전신)에 새로이 등장한 또 한 명의 흑인 영웅이었다.
휴전 후 귀국하여 다시 마운드에 올랐을 때도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1956년에는 27승 7패 평균자책 3.06의 빼어난 성적으로 리그 MVP와 사이영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뉴컴은 3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5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으나 0승 4패 방어율 8.59의 참담한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1958년 다저스가 연고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LA로 옮긴 후로는 늘 부상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신시네티와 클리블랜드 등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테드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1960년에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총 1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뉴컴은 149승 90패 평균자책 3.56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었으며, 그는 ‘신인왕-MVP-사이영상’을 모두 거머쥔 유일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피칭 외에 타격에도 큰 소질이 있었던 뉴컴은 메이저리그 통산 .271의 수준급 타격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뉴컴은 은퇴 이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자로 다시금 활약하며, ‘메이저리거의 일본진출 1호 선수’라는 특이한 경력까지 남겼다.
▲ ‘참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선 뭇 선수들
양키스에서 내야수로 활약하며 통산 723경기에서 타율 0.263, 16홈런, 217타점을 기록한 제리 콜맨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다. 그는 야구선수보다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더 성공한 인물이기도 한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2차 대전에서 57차례 출격했으며, 한국전에서 63차례 출격해 총 120차례 전투 비행의 기록을 세웠다. 2개의 공군 십자 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13개의 공군 수훈장(Air Medal), 3개의 해군 표창(Navy Citation)을 받은 그의 별명은 ‘캡틴(Captain)’이었다.
한국전 참전 외에 2차 대전에도 많은 야구영웅들이 아무 대가 없이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다. 양키스의 빌 디키, 조 디마지오(사진), 필 리주토, 요기 베라 등도 참전용사이며, 밥 펠러, 행크 그린버그 등도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투복을 입은 사나이들이다.
2차 대전 당시, 전미 대륙에는 “독일에 ‘하일 히틀러’라는 구호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플레이 볼’이 있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참전이라는 방법으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했고, 팬들은 참전하고 돌아 온 그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약 340명의 메이저리거와 3000명의 마이너리거가 징집 또는 자원입대를 통해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그 중 35명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리고 2명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 유진 김현희 [사진=S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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