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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프로야구 이야기

박찬호와 함께한 19년, 팬들도 너무나 행복했다!

by 카이져 김홍석 2012. 11. 30.

코리언특급박찬호를 더 이상 마운드 위에서 볼 수 없게 됐다. 박찬호는 30일 오전 11시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할 예정이다. 김응용 신임 감독의 러브콜과 팬들의 거듭되는 만류로 인해 한번 더 고민했을 뿐, 이미 박찬호의 마음은 은퇴 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었던 박찬호

 

박찬호는 한국 프로 스포츠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1994 1월 혈혈단신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후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이겨내며 메이저리그에서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꽃 피웠던 박찬호는 대한민국이 가장 사랑했던 스포츠 스타였다. 그는 도전자인 동시에 정복자였고, 한국인들의 자랑거리였다.

 

박찬호의 전성기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의 5년이었다. 19년의 길었던 프로 선수 생활을 돌이켜보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5년 동안 박찬호가 남긴 업적은 정말 대단했다. 5년 동안 연평균 15승을 기록했고, 2000시즌에는 18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IMF 한파로 인해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90년대 후반, 박찬호는 우리의 희망이자 자존심이었다. 야구장을 찾을 여유도 없고 회사에 출근해도 마땅히 할 일이 없던 그 당시, 국민들은 브라운관을 통해 박찬호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함께 울고 웃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케이블 채널을 통한 프로야구 전경기 생중계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오직 5~6일마다 돌아오는 박찬호의 등판 경기만이 서민들이 야구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박찬호는 꾸준한 승전보를 통해 고국의 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해준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박찬호의 은퇴 소식에 국민들에게 애잔한 심경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승리가 마치 대한민국의 승리처럼 여겨지고, 그의 성공이 마치 우리의 성공처럼 느껴졌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의 겪을 높이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절은 국내에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온라인 상에서의 각종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야구를 주제로 한 커뮤니티 역사 박찬호 덕분에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 우리나라 야구팬들의 의식 수준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메이저리그 경기를 지켜보면 국내 야구팬들은 그곳의 시스템과 야구 철학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하기 시작했다. 선발투수는 5일마다 한 번씩 등판해야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으며, 1회 등판시 투구수를 100개 안팎으로 조절해줘야 오래도록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데드볼이나 포볼등 잘못 사용되고 있는 야구 용어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당시였다.

 

쿠어스필드의 존재 덕분에 야구장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선수들의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야구팬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내용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너무나 생소한 정보들이 메이저리그 중계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 정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야구팬들의 의식 수준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팬들 뿐 아니라 현장에서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좋은 시스템이 프로야구에 그대로 적응되었으며, 잘못된 용어를 바꾸기 위한 몇몇 선구자들의 노력도 빛을 보기 시작했다. 모두 박찬호의 등장으로 인해 그 필요성을 느낀 팬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결과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는 역대 최고의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야구장 관람은 하나의 생활 속 문화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야구장은 80~90년대에 비해 훨씬 성숙해진 응원문화와 관전태도를 지닌 팬들로 가득 찼으며, 각 구단도 이젠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박찬호가 한국 야구에 미친 가장 긍정적인 영향 중 하나다.

 

박찬호가 남긴 추억은 팬들의 마음 속에

 

17년의 메이저리그 생활과 1년의 일본 무대 경험을 마친 박찬호는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와 고국의 팬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그가 선수 생활 내내 선수생활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했던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처럼 박찬호가 팬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팬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팬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2012년은 박찬호를 응원하고 아꼈던 팬들에게 또 하나의 큰 선물이 되어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예정이다.

 

지난 19년 동안 박찬호는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정말 많은 추억을 남겼고, 박찬호라는 이름 세 글자와 등번호 61번은 이미 한국 야구계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박찬호와 더불어 함께 성장해온 야구팬들은 영웅의 마지막 모습에 조용히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낼 뿐이다.

 

// 카이져 김홍석 [사진=한화 이글스, 홍순국의 순 스포츠]

 

☞ 이 글은 <데일리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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