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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실보다 득이 많았던 박찬호의 선발 등판

by 카이져 김홍석 2008. 5. 18.

정말 오랜만에 박찬호의 선발등판이 있었다. 그의 선발경기를 고대했던 수많은 팬들 중 일부는 새벽잠을 설치며, 또 어떤 이들은 (필자처럼) 밤을 꼬박 새워가며 그의 선발등판 경기를 지켜봤을 것이다.


결과 또한 무척 만족스럽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까지는 아니지만, 95점은 되고도 남을 경기였다.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많았던 시합이라고 볼 수 있다.


1) 솥뚜껑보고 놀란 1회


박찬호는 1년 만에 맞이한 선발 등판에서 첫 번째 타자인 레지 윌리츠를 5구만에 볼넷으로 내보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그 동안 LA 에인절스 전에서의 부진(상대 전적 5승 7패 방어율 5.90)과 올 시즌 내내 선발 등판과는 인연이 없었던 점 등이 떠오르며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찬호는 후속 타자를 2루수 앞 뜬 공과 병살타로 처리하면서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투구수도 11개, 볼넷으로 출발했던 것 치고는 매우 훌륭한 결과였다.


2) 완벽했던 2,3회

2회 선두타자인 개럿 앤더슨에게 2루타를 허용한 것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아마 안타를 친 본인더러 다시 때려보라고 해도 칠 수 있을지가 의문일 정도로 낮게 깔리는 공을 억지로 갖다 맞춘 결과였다. 이후의 세 타자는 모두 범타와 삼진으로 처리하며 이닝을 끝냈다. 특히 랍 퀸란과의 승부에서 95-93-95-95마일로 이어지던 패스트볼의 위력이 돋보였다. 이후에는 전성기 시절 수많은 탈삼진을 빼앗아냈던 커브로 삼진을 잡았다.


3회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했다. 13구만에 3자 범퇴. 패스트볼과 커브, 슬라이더를 적절히 섞어가며 최근의 물오른 피칭을 과시한 이닝이었다. 더구나 다저스 타선도 2회와 3회에 각각 2점씩을 뽑아주며 박찬호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3) 아쉽지만 만족할 수 있는 4회

4회는 박찬호 자신에게나 팬들에게나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첫 타자는 쉽게 잡았지만 자신의 천적인 블라드미르 게레로(박찬호 상대 4홈런 11타점 0.326)를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개럿 앤더슨은 이날 유일하게 박찬호에게 2개의 안타를 뺏어내며 1사 1,3루를 만들었고, 후속 케이시 카치먼의 병살타성 타구 때 1루수 제임스 로니가 통한의 송구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실점도 실점이지만, 90개 이하로 투구수 제한이 걸려 있었던 박찬호는 그 실책 때문에 4명의 타자를 더 상대해야만 했다. 만약 로니가 침착하게 더블 플레이를 성공시켰더라면 박찬호는 5회까지 마운드에 올라 승리투수의 기쁨을 누렸을 지도 모른다.


5이닝 2피안타 2사사구 무실점의 승리가 4이닝 3피안타 3사사구 2실점(1자책) 노 디시즌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조 토레 감독도 눈이 있는 이상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로니의 에러 이후 박찬호가 범한 실수라고는 올 시즌 20경기에서 단 3개의 볼넷밖에 얻어내지 못한 상대 포수 제프 매티스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것뿐이다.


4) 투구 수와 구질

박찬호는 이날 82개의 공을 던졌고 그 가운데 52개가 스트라이크였다. 스트라이크-볼 비율이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실책으로 인해 승부가 길어졌음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다.


38개를 던진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은 시속 92.2마일(148.5km)에 달했다. 1회 볼넷으로 내보낸 윌리츠와의 승부를 제외하면 4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꾸준하게 93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구사했다. 직구의 스피드나 변화구의 위력, 그리고 제구력까지 선발투수로서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만한 결과를 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5) 박찬호가 얻은 것?

오늘 박찬호는 3가지를 얻었다. 첫 번째는 선발 투수로도 통한다는 자신감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천적에 가까웠던 에인절스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점. 마지막으로 특히 좌타자를 상대로 약점을 노출하지 않았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로니의 실책만 없었더라면 그는 자신에게 강한 에인절스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을 것이다. 하나의 약점을 극복하고 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이 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다.


무엇보다 4명의 스위치히터를 포함해 사실상 6명의 좌타자로 구성된 타선을 3안타로 막았다는 점이 돋보였다. 올 시즌, 오늘 경기 전까지 박찬호는 좌타자를 상대로 0.368의 피안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성적은 좋았지만 고질적인 좌타자 공포증은 여전했던 것.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앤더슨에게 2안타를 허용했을 뿐 12타석 2안타 1볼넷만을 내주며 효과적으로 잡아냈다. 제구가 대체로 낮게 형성되는 가운데 좌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몸 쪽으로 승부한 것이 먹혀든 결과다.


자신을 가장 괴롭혀왔던 두 가지 약점을 이겨냈고, 그 이상의 자신감을 얻었다. 이것은 분명히 큰 힘이 되어 올 시즌 박찬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것이다.


6) 이후의 계획은?

경기가 진행되는 도중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19일(한국시간) 등판이 예정되어 있던 에이스 브래드 페니가 부상으로 등판이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릭 로우가 원래 일정보다 하루 앞당겨 3일 휴식 후 4일 만에 19일 경기에 등판하게 되었고, 만약 페니의 부상이 예상보다 커서 로테이션을 걸러야 한다면 다저스의 선발 투수들은 죄다 4일만의 등판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랬다면 일정상 28일까지 5선발이 필요 없었던 다저스도 22일 경기에 5선발을 투입해야 하고, 박찬호도 4일 만에 또다시 선발 등판의 기회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은 기우임이 드러났다. 곧이어 <LA 데일리 뉴스>는 페니의 증상이 단지 팔의 뻐근함을 느끼고 있는 것뿐이며, 그 때문에 로우와의 선발 등판 순서를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즉, 페니는 20일 경기에 등판하게 되고 박찬호는 22일에 등판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박찬호의 다음번 등판은 최소한 28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때까지 제이슨 슈미트가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조 토레 감독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오늘 호투한 궈홍즈(4이닝 3피안타 4탈삼진 무실점 승리투수)를 내세우지 않는 한 박찬호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4일만의 등판을 감행해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수 있다.


박찬호-궈홍즈-사이토로 이어진 아시아 3국 계투진은 다저스의 인터리그 성적을 1승 1패로 균형을 맞춰 놓았다. 조금은 느긋한 맘으로 기분 좋게 박찬호의 다음 번 선발 등판을 기다려보자. 그 때는 박찬호가 승리투수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 김홍석(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