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박찬호의 선발등판 경기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학교를 가야했기에 짧은 시간 밖에 보지 못하겠지만,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본 것은 딱 2회까지. 그 때까지 찬호의 투구는 정말 완벽에 가까웠다. 특히 2회 마지막 타자인 조 보차드를 삼진 잡았던 커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고, 이러한 컨디션이라면 어쩌면 간만에 메이져리그에서의 승리를 맛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해서 확인해본 최종 결과는 4이닝동안 7실점 하고 내려갔다는 안타까운 소식뿐이었다. 사실 좀 어이가 없었다. 내 눈을 과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컨디션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고, 아무리 맞는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난타당할 구위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궁금해서 정보들을 수집하고, 또 영상으로 확인해보니,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아무리 메츠가 현재 메이져리그 승률 1위의 팀이라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래가지고야 찬호가 힘을 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타자들이 실책에 가까운 안일한 수비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야구는 투수든 타자든 어느 한 쪽만 잘해서 가능한 운동이 아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다” 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모 해설가에 의해 유명해진 대한민국 야구 속설일뿐, 메이져리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다.
제목에 쓴 그대로, 투수를 살리는 건 타자고 마찬가지로 타자를 살리는 것도 투수다. 이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야구라는 경기는 이길 수가 없다.
9개월만의 메이져리그 선발 등판이었던 박찬호. 타자들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걔중엔 찬호의 선배격인 알루나 델가도, 이즐리 같은 선수들도 있고, 례이예스, 벨트란, 라이트는 후배뻘이다. 그리고 그린과 로두카는 한 때 다져스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료였다.
이미 스프링 캠프에서 같이 뛰었던 이들 사이에 그토록 유대관계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찬호는 1,2회에 정말 멋진 피칭을 했다. 마이너에서의 불안한 모습은 단지 일시적인 기우였었나 싶을 정도로 빼어난 피칭을 하며 2이닝을 삼자범퇴로 돌려세웠다. 삼진도 하나씩 곁들여서.
하지만 메츠는 1회 1사 1,2루의 찬스를 중심 타자인 델가도와 라이트의 후속타 불발로 인해 선제 득점에 실패했고, 2회에도 무사에 주자가 나갔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만약 이때 1점이라도 얻었더라면 약간은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찬호에게 한결 힘이 되지 않았을까?
반대로 찬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타자들이 득점찬스를 두 번이나 놓쳤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투수라는 보직을 가진 선수의 숙명이다. 3회 2사까지는 괜찮았지만, 여기서 웬만하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상대 투수 스캇 올슨에게 맞은 안타. 메이져리그의 승리 방정식이 있다면, 그 중 다섯손가락안에 꼽히고도 남을 요소가 바로 이것, 상대편 투수에게 안타를 허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쳤으면 좋았다. 하지만, 이미 10년이 넘게 찬호를 따라다니던 멘탈적인 문제는 여전했고, 그것은 어김없이 컨트롤 난조로 나타났다. 9구를 연속해서 볼을 던진 것이다.
이미 텍사스 시절 박찬호의 선발등판 때마다 해설자가 에이로드를 예로 들며 강조해 준 덕에, 우리는 수비시 야수들이 어떠한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매 투구마다 스텝을 밟으며 자신에게 공이 날아올 때를 대비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이것이 수비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것은 ‘승부’ 가 이루어질 때다. 고의 사구를 주는 상황에서 스텝을 밟고 긴장을 하는 야수는 없다. 선발투수가 공을 컨트롤 하지 못해 9개의 공이 연속으로 스트라익 존을 벗어나는 상황에서 과연 그러한 긴장감이 풀리지 않는 야수가 어디 있을까?
실책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데미안 이즐리의 약간은 어설픈 캐치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것을 또 멋지게 잡아서 찬호를 다시금 안정시키고, 경기의 기세를 가져오지 못하게 된 것은 명백한 이즐리의 실수이나, 그 혼자만의 실수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망스러운 점은 더 있다. 바로 카를로스 벨트란. 일주일 전에야 비로소 30번째 생일을 맞은 벨트란이지만 올해로 메이져리그 풀타임 경력만 벌써 10년째이다. 그간 중견수로 선발 출장한 경기만 1000경기가 훨씬 넘는 그가, 공을 등지고 달려오는 두 명의 내야수에게 제대로 된 콜 플레이를 해주지 않아 어이없는 안타를 만들어준 장면은 보는 입장에서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경기를 이길 수가 있을까? 결국 찬호는 4회 상대 8번 타자와 1번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은 악순환의 연속이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못 던졌고, 못 쳤고, 못 잡았다. 타자들은 투수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고, 투수 또한 야수들의 안정된 수비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오늘 마침 토론토와 텍사스의 시합도 있었다. 토론토 선발은 현재 메이져리그에서 손꼽히는 에이스 중 한명인 로이 할라데이.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회초 선두타자 로프턴에게 안타를 허용하고난 뒤에 재차 2,3루 도루를 허용하였고, 결국 소사에게 2루타를 허용하며 선취첨을 빼앗겼다. 토론토 타선도 1회말 공격때 1사 1,3루의 좋은 기회를 프랭크 토마스의 병살타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할라데이는 흔들리지 않고 2회초 깔끔하게 삼자범퇴 시켰고, 이에 부응하듯 2회말 트로이 글로스와 아론 힐이 홈런을 치며 3득점,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이후 토론토 타선도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할라데이가 2회부터 7회까지를 모두 단 3명의 타자만 상대하며 지켜냈고, 이후 타선이 다시 터지며 3점을 추가, 결국 로이 할라데이는 멋진 1실점 완투승을 따낼 수 있었다.
이기는 시합은 이런 흐름이 되어야 한다. 투수에 대한 타자들의 신뢰, 야수들에 대한 투수의 신뢰, 이것은 그냥 “그렇게 하자” 라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야구에서의 신뢰란 서로의 플레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다져스 시절 한국 언론은 게리 쉐필드를 ‘찬호 도우미’ 라고 불렀었다. 메이져리그 탑 수준의 외야수를 그러한 명칭으로 부른다는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별명이 붙을 만큼 둘의 관계는 특별했다.
이상하게도 쉐필드가 홈런친 경기는 찬호가 잘던졌고, 또 찬호가 잘 던지는 날은 항상 쉐필드가 홈런으로 화답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찬호는 제법 많은 승수를 쌓을 수 있었고, 또한 쉐필드와의 관계역시 더욱 돈독해 지는 듯 보였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닌가?
오늘 메츠의 경기 이후 또 다시 많은 게시판들이 과열되고 있다. 어떤 이는 무조건 박찬호를 폄하하기에 정신이 없고, 또 어떤 이는 이즐리를 비롯한 메츠 수비를 탓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오늘 경기의 결론은 ‘메츠’ 라는 팀의 패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늘 경기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메츠의 오마 미나야 단장은 엘 듀케가 돌아올 때까지 박찬호에게 선발의 한 축을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즉,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기회는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베터랑 중에서도 베터랑이라고 불려도 될만한 투수 박찬호. 적지않은 나이이기에 조바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베터랑답게 자신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팬들 역시도 그러했으면 한다.
다음번 박찬호 선발 경기때는 투수와 타자들이 하나되어 팀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멋진 경기를 한번 기대해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투수를 살리는 것은 타자고, 타자를 살리는 것은 투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