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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500홈런 프랭크 토마스와 제프 벡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7. 1.


며칠 전인 6월 28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휴스턴의 크렉 비지오는 3000안타를 달성하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빅 허트’ 프랭크 토마스는 500홈런에 도달했다. 인기나 실력,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기에 많은 축하를 받았고 이를 바라보는 팬들의 마음도 즐거웠다.


이날 비지오의 대기록 달성을 축하해주기 위해 Minute Maid Park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비지오와 함께 15년을 같은 팀에서 뛰다가 지난 오프시즌에 은퇴를 결심한 제프 벡웰이었다. 거포치고는 비교적 작은 체구로 힘찬 스윙을 했던 선수, 기마자세라는 독특한 타격폼과 빅리그 최고라는 손목힘으로 많은 홈런을 때려냈던 휴스턴 최고의 스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 몇 시간 앞서서 터진 토마스의 500홈런 소식도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절친한 친구이자 선배인 비지오가 자신이 은퇴한 뒤에도 현역으로 뛰며 3천 안타라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었고,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던 토마스는 자신이 결국 도달하지 못한 500홈런을 때려내는 모습을 보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01시즌 내도록 어깨와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161경기를 출장한 벡웰. 시즌이 끝나고 난 후 알게 된 정밀검사 결과는 모두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깨근육이 파열되어 있었던 것. 팬들과 전문가들은 이미 근육이 찢어진 상태라 정상적인 스윙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39홈런 130타점을 기록한 이 괴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다만 놀라움만 가득했을 뿐, 감히 그 어떠한 평가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때의 부상이 끝끝내 벡웰의 발목을 잡았고, 마침내 2005년 이후로는 더 이상 그를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휴스턴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스타였던 한 선수가 쓸쓸히 은퇴를 결심한 것이다. 벡웰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비지오는 이미 은퇴했거나, 뛰고 있더라도 에스트로스 소속이 아니었을 것이다.(휴스턴은 두 번이나 비지오를 포기하려고 했었지만, 벡웰이 강경한 자세로 막았기에 떠나지 않고 남을 수 있었다.)


벡웰보다 더 큰 위기를 맞았던 토마스는 벡웰이 물러난 작년 39홈런으로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한 때 최고의 라이벌로서 양대 리그를 대표하는 1루수였던 벡웰과 토마스. 한 선수에 대한 아쉬움과 다른 한 명에 대한 축하를 담아 두 명의 위대한 타자를 잠시나마 추억해 보려 한다.



◎ 90년대를 주름잡은 두 명의 1루수 - 제프 벡웰


공/수/주를 비롯 5툴 플레이어라는 점에서 90년대 최고의 선수는 분명 아메리칸 리그는 켄 그리피 주니어, 내셔널 리그는 배리 본즈다. 하지만 본즈의 뒤를 잇는 호타준족 거포인 벡웰은 일각에서는 본즈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프랭크 토마스의 경우 수비와 주루에서 미치지 못할 뿐 순수한 타격 능력과 그 가치는 양대리그를 통틀어서도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마크 맥과이어와 모 본이라는 스타 플레이어가 같은 포지션에 있었지만 전문가들이 리그별 베스트 나인을 꼽을 때면 항상 1루수 자리는 벡웰과 토마스의 것이었다.


프랭크 토마스는 1968년 5월 27일 조지아주에서 태어났고, 제프 벡웰은 1968년 5월 27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재미있게도 생년월일이 같은 두 사람은 이후 피부색은 다르지만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비슷한 행보와 성적을 보여준다. 그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보스턴에서 태어나 보스턴 팬으로 자란 벡웰은 1989년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꿈에도 그리던 레드삭스로부터 지명받는다. 그때만 하더라도 3루수였던 그는 이듬해 바로 마이너리그 더블A MVP로 뽑히는 등 빠른 성장세를 보였지만, 베이브 루스 팔아넘긴 일과 더불어 보스턴 역사상 최악의 실수로 꼽히는 트레이드로 인해 휴스턴으로 가게 된다.

  
1990년 디비젼 1위를 달리고 있던 보스턴이 불펜 보강을 위해, 휴스턴에서 래리 앤더슨을 받고 벡웰을 보내 버린 것이다. 당시 보스턴 3루수는 웨이드 보그스였고, 같은 해 1라운드 드래프티였던 된 1루수 모 본이 벡웰보다 한 단계 위인 트리플A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고 있었기에 포지션 변경도 꾀할 수 없었던 상황. 보스턴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휴스턴에서 1루수로 변신한 벡웰은 다음해 바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모 본 역시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지만 결국엔 벡웰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아쉬운 트레이드였을 것이다.


신인왕에 오른 뒤 점점 파워를 늘려가기 시작한 벡웰은 94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타자가 되었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 연속으로 30홈런 100타점 100득점 100볼넷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메이져리그 역사상 그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뛰어난 성적이었다. 1루수로서는 처음으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고(그것도 두 번이나), 91년부터 2000년까지 벡웰이 기록한 1073득점과 1093타점은 같은 기간 동안 내셔널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 90년대를 주름잡은 두 명의 1루수 - 프랭크 토마스


데뷔 당시만 하더라도 홈런 타자가 아닌 참을성 있는 교타자였던 벡웰과 달리, 처음부터 홈런 타자로 주목받았던 프랭크 토마스도 벡웰과 같은 해 1라운더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한다. 토마스 역시 괴물이었다. 90년 더블 A에서 109경기만에 112개의 볼넷을 얻어내는 등 .323/.487/.581의 어마어마한 성적으로 벡웰과 모 본을 제치고  ‘올해의 마이너리그 플레이어’ 로 뽑힌다.(둘은 그 해 더블A 올스타전에서 맞붙었다)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8월이 되면서 메이져리그로 콜업 되었고, 60경기에 출장하며 .330/.454/.529 를 기록, 비록 신인왕 자격은 잃어버렸지만 다음해 팀의 주전 1루수 자리를 보장받게 된다. 그리고 1991년부터 프랭트 토마스의 전설이 시작된다. 7년 연속 3할 20홈런 100타점 100득점 100볼넷 이상이라는 메이져리그 유일의 기록을 작성했고, 그 기간 동안 두 번의 1위를 비롯해 MVP 투표에서 3위 2번, 8위 3번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97년 시즌이 종료되었을 당시 프랭크 토마스는 통산 타율이 .330이었고 4할 5푼이 넘는 출루율과 6할의 장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의 알버트 푸홀스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으며, 당시 리그 평균을 고려한 조정 OPS에서는 오히려 푸홀스를 앞서는 성적이다. 당대 최고의 타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성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지명타자로 나서기 시작한 1998년,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부진에 빠지며 .265의 타율을 기록해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더니 이듬해 겨우 3할을 기록했지만 파워가 줄어들며 15홈런 77타점에 그치는 등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다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며 팀을 포스트 시즌으로 이끌었고 다시 MVP 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오르며 부활한다.


아쉽게도 두 명은 명성에 비해 많은 타이틀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벡웰은 득점왕 3회를 달성했지만, 타점과 장타율에서 한번씩 1위를 했을 뿐, 타율/출루율/홈런 에서는 한번도 1위를 기록하지 못했다. 토마스 역시도 네 번이나 출루율 1위를 기록했지만 그 외에는 타율/득점/장타율에서 한번씩 1위를 기록했을 뿐 홈런과 타점 1위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500홈런 달성자 중 홈런왕 타이틀이 없는 선수는 라파엘 팔메이로와 토마스뿐이다.



◎ 통한의 파업 시즌인 1994년


1994년은 다양한 기록이 여럿 탄생될 가능성이 높은 시즌이었지만, 파업으로 인해 그 모든 꿈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려 그 안타까움을 더했던 시즌이었다. 114경기 만에 시즌이 종료되면서 그렉 매덕스의 위대한 시즌(25경기 16승 10완투 202이닝 투구 방어율 1.56)과 맷 윌리암스(43홈런-61홈런 페이스)의 홈런 신기록 도전이 무위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 양대 리그 MVP의 개인성적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기에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벡웰은 114경기에서 .368/.451/.750의 비율 스탯을 보이며 39홈런 116타점 104득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바탕으로 만장일치로 MVP에 올랐고, 113경기에서 .353/.487/.729 비율 스탯에 38홈런 101타점 106득점을 곁들인 프랭크 토마스는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MVP에 선정되었다. 벡웰의 장타율 .750은 당시만 해도 역대 6위의 기록(현재는 11위)으로 1927년 베이브 루스(.772)와 루 게릭(.765) 이후 무려 67년만의 최고 성적이었고, 토마스가 보여준 1.217의 OPS도 테드 윌리암스 이후 가장 뛰어난 기록이었다.


단지 빅리그에서 처음으로 생년월일이 같은 두 명의 MVP 수상자가 배출되었다는 재미있는 사실만이 94년의 추억으로 남기에는 너무도 아까웠던 한 해였다. 원래대로 162경기가 치러졌다면 두 선수 모두 무난히 50홈런 고지에 올랐을 테고,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최고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기억될만한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레전드급으로 남을만한 최고의 한 때를 파업으로 놓쳐버린 당사자들의 아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 친정팀에서 버림받은 두 사람


20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휴스턴은 앤론 필드(현 미닛 메이드 파크)를 개장한다. 전 구장인 에스트로돔은 다져 스타디움, 터너 필드와 함께 메이져리그에서 가장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었지만, 앤론 필드는 그와 정 반대의 구장이었다. 좌측 펜스가 짧은 탓에 개장 첫 해에 쿠어스 필드에 이어 파크 팩터 2위를 기록할 만큼 타자에게, 그것도 우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제프 벡웰을 위해 지어진 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구장의 덕을 봤음인지 벡웰은 자신의 개인 최다 홈런인 47홈런과 함께 132타점을 기록했고, 이와 더불어 1936년 루 게릭(167득점) 이후 최고 기록인 152득점을 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희망 가득한 미래뿐인 듯 보였다. 이미 토마스가 지명타자로 옮긴 이후, 현역 중에 그 보다 뛰어난 1루수로 평가받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고, 500홈런 더 나아가 600홈런 고지까지 노리며 루 게릭의 역대 최고 1루수 자리까지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의 어깨부상과 함께 그의 성적은 점차 내리막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2005년 5월 3일로 그의 정규시즌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시즌 종료 직전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방망이도 제대로 휘두를 수 없는 몸 상태였기에 간간히 대타로나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삭스와의 월드시리즈 2차전에 선발 1루수로 출장한 것이 그의 공식전 마지막 선발 출장이었고, 그 시합의 9회에 나온 중전 안타가 그의 선수생활 마지막 안타였다.


벡웰은 누가 머랄 것도 없는 휴스턴 팀 역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그의 후계자격인 랜스 버크만에 의해 하나씩 경신되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팀 개인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고, 창단 이후 30년 동안 단 3번 디비젼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 전부였던 팀을, 6번이나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다. 랜스 버크만의 성장은 벡웰이라는 훌륭한 모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유명한 ‘킬러-B’라는 별명도 벡웰이 없었다면 알려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를 휴스턴은 너무나도 비정하게 내친다. 2006년에 받게 되어있는 벡웰의 연봉은 1700만불, 자신은 재활을 원했으나 팀은 보험금을 위해 그를 부상자 명단에 올리고 은퇴를 종용했다. 그리고 지난 오프시즌 기간 동안 클럽 옵션이 걸려있던 그를 휴스턴은 7백만 불에 바이아웃 했고, 벡웰은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15년 동안 한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선수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벡웰의 선수생활의 마지막이 되었던 2005년 월드시리즈는 프랭크 토마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7년 이후 2년간 부진 이후 한 해 부활 이라는 공식을 이어가던 토마스는 부상으로 월드시리즈 엔트리에도 들지 못한 채 자신이 빠진 팀의 우승을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벡웰과 토마스는 둘 다 자신들의 첫 월드시리즈에서 큰 공헌도 하지 못했고, 자신의 손으로 우승을 일구어내지도 못했다.


토마스는 시즌 종료 후 “연봉을 삭감해도 좋으니 팀에 남고 싶다” 고 말했지만, 구단측에서는 상호 옵션(천만 달러)을 거부하고 350만 불에 그를 바이아웃 해버린다. 물론 지난 8년간 2시즌을 제외하고는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활약과 부상으로 아예 경기에서 뛰지도 못했던 적이 더 많았던 토마스이기에 구단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하지만 역시나 아쉬운 이별이었다.


그래도 벡웰에 비하면 토마스는 행복한 편이다. 친정팀을 뒤로 한 채 50만 달러라는 헐값에 오클랜드와 계약한 그는  39홈런 114타점으로 다시금 살아나며 어슬레틱스의 포스트시즌 진출 1등 공신이 된다. 비록 타율 등의 다른 스탯이 부족해 MVP 투표에서는 4위에 그치고 말지만, 일부에서는 ‘실질적인 MVP는 토마스다’ 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2년간 1812만불에 토론토와 계약을 했고, 지명타자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고 마침내 결국 500홈런 고지까지 점령했으니 벡웰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할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체격에서 한 수 위였던 토마스와는 달리, 자신의 핸디캡을 보완하고자 특이한 타격 자세를 취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던 벡웰. 두 선수 모두 위대한 선수였고, 마찬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재기에 성공해 그 캐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토마스보다는 이미 은퇴를 해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는 제프 벡웰이 더욱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