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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비운의 천재 투수 삼인방(2) - 릭 엔키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8. 10.

그가 빅리그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너리그 성적을 감안했을 때 이르면 8월, 늦어도 25인 로스터가 40인 로스터로 확장되는 9월에는 메이저리그로 진입할 것이 예상되었던 그가 다소 이른 시기인 8월 9일(현지시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로스터에 정식으로 그 이름을 다시 올렸다.


‘비운의 천재 투수 삼인방’ 시리즈의 두 번째 주인공이며, 그야말로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 19세의 나이에 세간으로부터 ‘천재’ 라는 평을 들었던 선수, 바로 릭 엔키엘이다.


콜업 되자마자 선발 우익수 겸 2번 타자로 경기에 나선 엔키엘은 첫 세 번의 타석은 2개의 삼진을 당하는 등 힘 없이 물러나는 듯 했으나, 마침내 7회 말, 상대투수 덕 브로카일이 던진 바깥쪽 아래로 떨어지는 79마일의 변화구를 받아쳐 우월 스리런 홈런으로 만든다. 3년 만에 다시 밟은 빅리그 무대에서의 멋진 신고식이었다.


▷ 흘러간 추억들...

1999년 8월, 19세 생일을 맞이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릭 엔키엘은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킨 경력을 가지고 빅리그에 입성한다, 자신의 기념적인 첫 번째 등판을 5이닝 3실점의 괜찮은 투구로 장식한 그는 두 번째 선발 등판에서 존 스몰츠와 맞붙게 된다. 6회까지 2실점하고 동점상황에서 마운드에서 내려온 엔키엘, 비록 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스몰츠(8이닝 3실점)와 맞상대 하면서도 위축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데뷔 첫해 33이닝 동안 39개의 삼진을 잡으며 .215의 피안타율과 3.27의 방어율로 성공적인 첫 번째 시즌을 맞이한 엔키엘은 2000년 여전히 19세인 나이로 신인왕을 노리며 자신의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다.(메이저리그에서 선수들의 나이는 6월 1일을 기준으로 한다. 엔키엘은 7월 19일생)


2000년 5월 13일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박찬호와 릭 엔키엘이 맞붙은 적이 있다. 둘 모두 125구라는 적지 않은 투구수를 기록하며 필사의 투혼을 발휘했던 경기. 엔키엘은 7회까지 4피안타 4볼넷에 9개의 삼진을 기록하며 무실점, 1:0으로 이기던 시점에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구원 투수들이 3실점하며 그의 승리를 날렸고, 노련함으로 8회까지 버틴 박찬호는 3피안타 3볼넷 12탈삼진 1실점으로 시즌 4승째를 올렸다. 그 해 전 경기를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멋진 투수전이었다.


6월 25일 다시금 다져스 전에 등판한 엔키엘의 이번 상대는 ‘에이스’ 케빈 브라운이었다. 엔키엘은 7이닝을 던지며 1실점, 브라운도 130개의 공을 던지며 8회까지 버텼지만 역시나 1실점 하고 승패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져스의 구원투수가 실점을 해 경기는 카디널스가 가져갔지만, 메이저리그 특급 에이스 케빈 브라운과 19세 루키의 맞대결은 또 다시 멋진 투수전으로 기억되었다.


30번의 선발 등판 경기 중에서 여섯 번이나 두 자리 수 탈삼진을 기록한 이 괴물 루키는 175이닝을 던지는 동안 137개의 안타만을 허용했고(.219 리그 2위) 90개의 볼넷을 허용하긴 했지만 194개나 되는 탈삼진을 빼앗기도 했다. 11승 7패 방어율 3.50으로 어디에 내놓더라도 뒤처지지 않는 빼어난 성적이었다. 신인인 만큼 투구수를 조절하느라 승수가 적었을 뿐, 투구 내용은 웬만한 15승 투수 이상이었다.


특히 8월 18일까지 4.04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던 엔키엘은 남은 7번의 등판을 모두 2실점 이하로 막아내며 45.2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10실점(방어율 1.97), 시즌 방어율을 3.50까지 끌어내리면서 최고의 분위기로 시즌을 마감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그의 불행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 악몽과도 같은 그 경기...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세인트루이스를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큰 토니 라루사 감독은 시즌 마지막 두 경기에서 10실점 하며 피로함을 내비친 에이스 대럴 카일(당시 20승 9패 3.91) 대신, 이제 막 20세가 된 물이 한창 오른 루키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디비즌 시리즈 1차전 선발 투수로 예고한다.


스몰츠와 브라운 등의 당대 최고의 투수들과의 맞대결에서, 오히려 더 빼어난 투구 내용을 보여 만큼 배짱 두둑한 엔키엘 이었기에 그다지 무리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몰랐다. 괴물 루키에게는 아직 완전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정도의 나이와 경력이 없다는 사실을, 모든 역경들을 워낙 잘 이겨냈기에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지만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 어린 투수의 정신력은 한계에 봉착해 있었음을 말이다.


시즌 내내 팬들을 흥분시킨 19세 루키와 ‘마스터’ 그렉 매덕스와의 맞대결이었기에 홈에서 펼쳐지는 1차전을 보러온 카디널스 팬들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컨디션이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엔키엘은 2회까지는 2개의 안타와 2개의 볼넷을 내주면서도 무실점으로 막았다. 게다가 팀 타선은 1회부터 매덕스를 두드리며 6득점. 엔키엘의 포스트 시즌 첫 승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문제의 3회 초가 찾아온다.


선두 타자인 투수 매덕스에게 볼넷을 내 준 것으로 시작해 이후 1번 타자 라파엘 퍼칼은 1루 직선타로 잡았지만 그 이후, 폭투-폭투-볼넷-폭투-삼진 아웃-폭투-볼넷-안타-폭투-볼넷-안타, 결국 엔키엘은 4실점 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한 이닝 5개의 폭투는 정규시즌을 포함해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기록이다.


사실상 이 한 경기를 끝으로 ‘투수’ 릭 엔키엘은 사라진다. 악몽과도 같은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증상, 같은 증상을 보였던 70년대 투수의 이름을 따온 명칭)이 찾아온 것이다.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어렸을 때부터 엔키엘은 감수성이 풍부하면서도 일견으로는 다소 나약해 보이기도 하는 소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야구 코치이자 친구였으며, 그의 조언자였다. 리틀 야구 시절부터 힘든 체력단련과 스윙연습을 시키며 엔키엘을 단련시킨 릭 엔키엘 시니어는 어린 아들에게 부드러운 투구 폼을 가르쳐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들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자랑하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던 아들을 더욱 채찍질 하는 아버지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지만, 마음이 여렸던 엔키엘은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는 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자신을 힘들게 한 아버지였지만, 그런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는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엔키엘의 아버지는 불법 무기를 판매하고, 마약을 거래하는 등의 범죄자였고 수 십 번이나 구속된 적이 있는 경력의 소유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등의 아픔을 겨우겨우 이겨내며, 외줄타기를 하듯 힘들게 버텨온 그의 정신력은, 아버지가 또다시 체포된 상태에서 펼쳐진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 마침내 그 줄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항상 몰아치기만 하던 아버지 아래에서 늘 기대기만 한 터라 정신력의 성장이 실력을 따라가지 못했던 엔키엘은 그 한 경기로 인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재기를 위해서라도 아버지의 존재는 꼭 필요했지만, 엔키엘 시니어는 2001년 4월 실형 6년을 선고받으면서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고, 엔키엘은 투수로서의 홀로서기에 실패하고 만다.


▷ 타자로서의 눈물겨운 변신

재기를 향한 그의 몸부림은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2001년 시즌 개막 한 달 만에 빅리그에서 루키리그로 떨어진 엔키엘은 혼자서 끝없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시나 더 이상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또 한명의 괴물 알버트 푸홀스가 등장하면서 카디널스 팬들조차도 점점 엔키엘을 잊어갔다.


결국 부상까지 겹치며 2년을 허비하기도 한 엔키엘에게 2004년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으나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그 이후 엔키엘 본인과 팀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원래부터 투-타에 있어 만능이었던 선수였던 엔키엘을 타자로 변신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무모해 보일수도 있는 도전이었지만 시도할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루키 시절이던 2000년 그는 투수로 경기에 나서면서도 2개의 홈런을 때린 강펀치의 소유자였다. 심지어 루키리그로 내려간 이듬해는 투수로 경기에 나서면서도 종종 대타로 출장하는 등 41경기에서 무려 10홈런 35타점 .286/.364/.638의 장타력을 과시하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도 타석에서는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투수로서의 미련을 접은 그는 마침내 타자로서의 전향을 결심하고 혹독한 훈련에 돌입한다. 그 진가는 첫해인 2005년에 바로 드러난다. 싱글 A와 더블 A를 오가며 85경기에서 21홈런 75타점을 기록, 래리 워커의 은퇴 이후 카디널스 외야의 한 자리를 책임질 확실한 카드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은 또 다시 찾아온다. 빅리그 승격이 확실해 보였던 2006년 4월 무릎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그는 결국 시즌을 마감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 또 다시 시련의 시작이었다. 2007년 부상이 완치되었으나, 이번에는 자리가 문제였다. 짐 에드먼즈, 크리스 덩컨, 프래스턴 윌슨에 후안 앤카네이션까지 있는 카디널스의 외야에 빈자리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또 다시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엔키엘은 7년 전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20살이었던 당시는 모든 것이 어렵고 두려웠을 터, 그렇지만 27살의 엔키엘은 달랐다.


트리플 A 멤피스 레드버즈에서 시즌을 맞이한 그는 시즌 초반부터 홈런을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101경기에서 무려 3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89타점 61득점을 기록했다. 2할 7푼의 타율은 짧은 타자로서의 경력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개선의 여지가 있고 .574의 장타율은 놀랍기만 하다. 물론 타율에 비해 낮은 출루율(.316 24볼넷)이 걱정이긴 하지만 타자로서 두 번째 풀타임을 맞이한 선수의 성적이라면 흠이라 할 수 없다.


마이너리그 통합 홈런 1위를 달리며 부름을 기다리던 그는 마침내 메이저리그로 콜업 되었고, 그를 보고 열광하는 홈 팬들에게 홈런을 선물한다. 자신의 빅리그 통산 3호 홈런이었다.


▷ 아듀 ‘제 2의 샌디 쿠펙스’

지난 번 1탄의 주인공이었던 캐리 우드의 경우, 그 모델을 바로 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로져 클레멘스와 너무도 닮아 있었던 그는 ‘제 2의 로켓맨’ 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엔키엘의 경우는 현역 선수 중에 쉽게 닮은꼴을 찾기가 어려웠다. 웬만한 특급 선수들은 우완인 경우가 많았고, 좌완인 랜디 존슨과 탐 글래빈의 경우 스타일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비교 대상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엔키엘에게 어울리는 모델을 찾아주기 위해선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명인 ‘샌디 쿠펙스’의 이름을 빌려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제 2의 샌디 쿠펙스’로 주목받게 된다. 19세에 맞이한 루키 시즌의 성적은 그러한 명성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데뷔(79년생 1999년 데뷔)는 메이저리그의 수많은 동갑내기 선수들(요한 산타나, 라이언 하워드, 마크 벌리, 아담 던 등) 중 애드리언 벨트레를 제외하고는 가장 빠른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한두 살 많은 투수들 중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빅리그에서 성공을 거둔 선수는 아무도 없다.


요즘 300승 투수 멸종론이 대두되고 있지만 엔키엘이 투수로서 무난히 성장해 왔더라면 그러한 논쟁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랜디 존슨을 제외하고는 그럴싸한 좌완 파워피처가 없던 2000년 당시 30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19세의 루키는 분명 팬들의 마음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엔키엘로부터 쿠펙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 새로운 모델을 찾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만 28세 생일을 지나 다소 늦은 나이에 타자로서 빅리그에 데뷔한 엔키엘이 앞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만큼의 커리어를 쌓을 확률은 희박하다. 50년 후에는 단순히 재미난 에피소드를 제공한 한 명의 불운한 선수로만 기억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고, 그의 루키 시즌을 봤던, 엔키엘과 박찬호의 피말리는 투수전을 지켜봤던 우리들이 엔키엘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다르다. 나약했던 20세 소년(?)이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처 28세의 장성한 청년으로 자라나 인간 승리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는 엔키엘을 향해 뜨거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박수를 쳐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