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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이승호,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 1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7.


'좋은 왼손투수가 지옥에 있거든 물불 가리지 말고 가서 구해주어라.'

위의 말은 야구계에 내려오는 불문율 중 하나다. 즉, 95마일(약 155km)이상 나오는 왼손 투수는 무조건 존경해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써,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역량을 지닌 선수를 잡아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왼손투수의 공은 오른손 투수에 비해 눈으로 체감하는 속도가 3~4km 이상 빠르기 마련이고, 변화구 각도와 무브먼트에 있어서도 오른손 투수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더 날카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우스포’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왼손 투수를 발굴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또 어렵게 발견한 왼손 투수들 중에서 특A급 판정을 받는 투수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별따기'다.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메이저리그에서조차 특A급 왼손투수는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다. 레프티 그로브, 워랜 스판, 토미 존, 샌디 쿠팩스, 랜디 존슨 등이 이에 속하며, 현역 중년 선수들 중에는 요한 산타나, C.C.사바시아, 클리프 리 정도가 A+를 받을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좋은 왼손 투수를 찾기 어려운데, 하물며 30년 내외의 역사를 지닌 한국프로야구에서는 또 어떻겠는가. 송진우, 이상훈이 괄목할 만한 커리어를 쌓아 레전드로 남았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스무살을 넘긴 김광현이나 류현진, 장원삼 등 젊은 선수들이 레프티라는 사실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 전에 척박한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 드물다는 '왼손 파워피처'의 계보를 잇는 투수가 있었다. 2003 시즌에 탈삼진 157개를 잡아내며, 풀타임 선발 첫해에 바로 삼진왕 타이틀을 차지했던 그 - 최근 SK로 둥지를 바꾼 ‘형님’ 이승호다.


▶ 인간 이승호, 그는 누구인가??

이승호는 1976년 8월 23일에 태어나 강남초(89졸) - 강남중(92졸) - 선린상고(95졸) - 단국대(99졸)를 거쳐 1999년 2차지명 1순위로 LG에 입단했다. 189cm에 90kg의 준수한 체격조건을 갖추었으며, 큰 키에서 내리꼳는 빠른볼이 상당히 일품이었던 선수다. 흡사 오클랜드 시절의 마크 멀더와 비슷한 유형이었던 셈이다.

'유망주'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다니기는 했지만, 아마시절때에는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는 못하였고 좋은 투수라면 한 번씩은 달아야 할 국가대표 역시 단 한 번도 지내지는 못하였다. 눈에 띠는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유망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꾸준함'에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시대에 다른 특급 유망주들이 많은 주목을 받아오던 터라 이승호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99년 고졸 신인 우선지명 당시에 많은 주목을 받았던 휘문고의 박용택이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선린상고 재학 시절에는 신일고 김재현, 배명고 김동주 등의 유명세에 이승호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는 않았다.

여기에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으로 뽑혀 큰 유명세를 탔었던 이병규까지 99년에 프로 적응 3년만에 30-30 클럽을 가입했을 정도이니, 이승호가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많지는 않았던 셈이다. 오히려 같은 시기의 김광삼 선수가 고졸 계약금 2억 6천 5백만원을 받고 LG에 입단하여 더욱 더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유망한 좌완투수였으나 세간의 이목을 받지는 못한, 아쉬운 아마시절을 보낸, 그런 선수였다.


▶ 최종준 단장과의 만남

설상가상으로 99년 졸업 이후 벌어진 아마 드래프트를 앞두고 이승호는 어깨부상을 당하고 만다. 꾸준함이 무기였던 이승호 앞에 어깨부상은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과감하게 이승호를 뽑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前 LG 단장 최종준씨였다.

2차 지명을 앞두고 누구를 뽑을까 고민하던 최단장은 과감하게 어깨부상중인 이승호를 뽑았는데, 이를 두고 LG 프런트에서 상당히 말이 많았다. 신인이라 함은 싱싱한 어깨를 바탕으로 좋은 투구를 선보여야 하는데, 어깨부상을 당한 선수를 뽑아 뭘 어떻게 하냐는 식의 말이 오갔던 것이다. 많은 곤욕을 치루었지만 결국 최단장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계약금 1억 3천만원, 연봉 2,000만원에 입단계약을 체결하면서 이승호는 LG로 올 수 있었다.

만약에 최단장이 승호선수가 아닌 다른 선수를 2차 1번지명으로 뽑았다면, 이승호는 다른 구단으로 지명되거나 최악의 경우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드래프트 당시에 최단장은 1, 2년이 아닌 3, 4년을 앞두고 그를 픽업한 것이었으며, 그의 선택이 옳았음은 나중에서야 증명이 된 셈이다.

프로첫해, 이승호는 그다지 썩 좋은 활약을 펼쳐주지는 못한다. 17경기에 등판하여 10과 2/3 이닝을 던져 방어율 10.13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어깨부상의 후유증과 아마선수의 프로적응이 어려움에 기인한 바 컸다. 이때에는 선발요원이 아닌 중간계투나 원포인트 릴리프로 주로 활약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LG 마운드가 거의 '붕괴'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 엇갈렸던 3년

그러나 2000년 시즌에는 상당히 좋은 활약을 펼치게 된다. 41경기에 등판하여 방어율 3.20에 6승 6패 5세이브를 기록하여 LG 마운드에 큰 활력소로 다가온 것이다. 이 시기에 생애 첫 완봉승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다(5월 24일, 광주 해태전 9이닝 3피안타 6탈삼진). 하지만 이 해에는 대부분 불펜에서 한 시즌을 보내며 임시 마무리 투수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호가 선발진에서 꾸준하게 활약했다면, 그해 신인왕 수상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이때 신인왕은 동명이인의 SK 이승호 선수에게 돌아갔다). 어쨌든 신인 시절이었던 99년보다는 조금 나은 모습을 보였던 '희망의 2000년' 이었다.

2000년도가 승호선수에게 큰 희망을 안겨 준 한해였다고 한다면, 2001년도에는 다시 찾아온 부상으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 한해이기도 했다. 지난시즌 플레이오프 이후 허리통증에 시달려 왔었던 승호선수는 결국 8월을 끝으로 시즌아웃되며 내년 시즌을 기약하기로 약속한다. 그가 전선에서 이탈했던 2001년도에 LG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투-타에서 동반부진을 경험하였고, 회심차게 영입한 FA 홍현우, 외국인 선수 로마이어 등은 한편의 '쇼'에 불과할 뿐이었다.

허리부상을 딛고 일어선 2002년, 승호선수는 불팬에서 다시 한 번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한 몫 한다. 초반 부진으로 한때 2군으로 추락하기도 하였지만, 6월 16일 청주 한화전에서 이틀 연속으로 구원승을 올렸으며, 9월 4일에 등판한 對 한화전에서 선발등판하여 두자릿수 삼진(10개)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 이광환 감독의 파격 기용

2003년을 앞두고 LG 구단은 지난해 한국시리즈 진출의 원동력이었던 명장 김성근 감독을 해임하는 큰 실수를 하게 된다. 구단과의 불화설로 인하여 지난해 성적에 대한 보상 없이 일방적으로 물러난 데에 따른 비난의 화살은 LG 구단을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어려운 시기에 새 사령탑이 된 이광환 前 감독은 시즌을 앞두고 이동현을 제1선발에, 이승호를 제2선발에 내세울 것임을 천명하였다. 만자니오가 빠진 LG 선발마운드에 두 신예 선수의 등장은 다소 의외였을 수 있었으나, 이동현은 한국시리즈 진출 당시에 '선발급 셋업맨'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해 내었고, 이는 결국 2003년도 선발진입에 청신호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 이승호도 지난 몇 년 동안의 선발등판 결과가 상당히 좋았고, 또한 젊은 선수들을 과감하게 믿고 맡기는 이광환 감독의 승부수에 두 선수가 제대로 걸려 든 것이다.

그러나 이동현은 시즌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고 말았고, 그로 인하여 제1선발의 중책은 이승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광환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이승호는 전반기 내내 좋은 피칭으로 LG 마운드에 큰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고, 연일 벌어지는 삼전 퍼레이드에 관중들은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2002년 까지만 해도 만자니오의 등판 이후에도 승리에 대한 확신이 반반이었던 LG 팬들에게도 이승호라는 사우스포의 등장은 상당히 반가운 존재였다. 이제는 '이승호만 나오면 이길 확률이 높아지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야구장을 찾게 되었고, 이승호는 그런 관중들의 기대에도 부응하여 2003년 한 해동안 방어율 3.19(2위)에 두 자리 승수(11승)를 거두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척박한 한국 프로야구 시장에서 나온 왼손 선발투수의 활약이었기에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또한 '닥터 K'의 상징이라는 탈삼진왕 타이틀을 차지하여 이상훈 부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승호는 당시 김재박 감독이 이끌던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도 뽑히게 되었다. 아마야구에서 성취하지 못한 태극마크를 프로에 와서야 달게 되는 겹경사까지 맞게 된 셈이다. 이때 당시 이승호는 對 일본전에 등판하여 구대성 부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경기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이 패배가 한국의 아테네 올림픽행 좌절과 연결되었지만, 한국 프로야구는 이승호라는 걸출한 국가대표 에이스의 등장에 만족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사진(C) = MC유진, 2부에서 계속]

// MC유진(http://mlbspecial.net)